‘정치’와 ‘정책’의 시간은 오지 않고 ‘정쟁’의 시간만 흐른다. 미디어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데 이에 조응하는 법제도 개선과 정책개발보다는 미디어 관련 기구의 인적청산을 통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만 몰두한다. 주어를 ‘윤석열 정부’에서 ‘문재인 정부’로, 혹은 그 이전 정부로 바꿔도 크게 다를 게 없는 설명이다. 다만 윤석열 정부는 ‘정략적’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약탈적 행위만 있다”는 게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겸임교수의 지적이다.
‘상식’의 범주 안에서 ‘설마’ 했던 일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시행령 개정만으로 30년 만에 TV 수신료 분리징수가 결정됐고, YTN은 민간 자본에 넘어갔으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위법·위헌적 내용 규제로 연일 논란이다. 수신료와 YTN은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고, “일단 저질러 놓은 일을 다시 돌이키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김천수 명지대 교수의 말이다. 그러면 “늑대로부터 양을 지키지 못한 양치기의 무능”을 탓해야 할까. 김 교수는 “양치기를 뭐라 할 게 아니라 울타리를 두껍게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로 한국언론정보학회가 2일 개최한 ‘정치의 시간, 정책의 시간’ 기획세미나에선 반성과 성찰이 주요 화두처럼 언급됐다. “잘못된 제도를 고치지 않고” 미뤄둔 데 학계 책임도 있다는 거다. 정수영 MBC 전문연구위원은 지금의 상황이 “해야 할 것을 안 한 결과”라고 했다. 그는 “보수든 진보든, 지난 정부에서 구조적 문제와 결함을 빨리 고쳐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그때 지적된 약한 고리들을 지금 정부가 다 건드리고 있는 거”라며 “‘어차피 못할 거야’ 다들 그랬다. 양치기를 탓하기엔 우리 모두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심영섭 교수는 “문재인 정부 때 공영방송을 정의하고 관련 법을 제정하지 않은 이유가 우리 정부에서 사장과 이사를 임명하고 바꾸자는 거였는데 그리고 정권을 잃었다. 민주당도 한 번도 본인들이 쥔 칼자루를 놓은 적이 없다. 그걸 충분히 휘두르다 새로운 칼을 만들기 위해 법을 만들었는데 이제 칼 쓸 사람이 바뀐 거다”라며 “정책 상실과 파행의 원인이 저쪽(보수)에만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현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수영 위원도 “사람들은 이미 학습된 무기력과 냉소, 불신에 빠져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언론정책의 무도함을 비판하는 만큼 문재인 정권에서 왜 안 했는가에 관한 진솔한 성찰과 비판 없이는 국민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데드 덕’ 정부에선 공공성 기대 요원…학계·시민사회가 대안 마련해야
곧 집권 2주년을 맞는 윤석열 정부가 그간 정부 입법 등을 통해 구현한 미디어 정책은 ‘0’이다. 심 교수는 “철학도 정책도 없고 갈등만 격화시켰다”고 했다. 국무총리 산하 미디어·콘텐츠산업융합발전위원회(융발위)가 지난 3월 ‘미디어·콘텐츠 산업융합 발전방안’을 내놓았지만, “융발위 구성 과정부터 미디어 공공성 의제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다. 심 교수는 “윤 정부의 데드 덕(dead duck·권력 공백) 상황이 계속되면 공공성은 더 요원하다”고 했다.
그는 “2년 뒤 지방선거까지 현 정부가 바뀔 것이냐, 다른 정책을 펼 것이냐. 민주당은 여전히 정쟁만 하고 있고, 차선이든 차악이든 정책을 뽑아내야 하는데 본인들의 선명성만 주장하고 있다. 미디어판은 계속 망가지고 대립은 계속될 것”이라면서 “시민사회와 학계는 ‘부서진 배에 함께 올라탄 자’의 슬픔과 간절함을 느끼며 정책 개발과 대안 마련, ‘희망’을 찾기 위한 숙고를 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최세경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미디어를 정치적 도구로 악용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정치권의 의지와 실천이 선행”돼야 하나 여야 모두 먼저 나서지 않을 것이라며 “학계 등 시민사회가 그 여건과 환경을 조성해 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치권은 한발씩 물러나 있고 다양한 사회의 제 세력, 이해관계자, 학계 전문가 등이 참여해 한국 사회에 적합한 미디어 제도의 이상향을 숙의하고 설계할 수 있는 장과 절차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최 위원은 “새로 개편하는 미디어 법제도의 정비, 정책추진체계의 개편 등은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2027년 5월 이전에 일괄 마무리하고, 다음 정부부터 시행”하는 데 미리 합의해 “미디어 제도 개편의 결과로부터 어떤 정치세력이 유불리 혜택을 얻을지 알 수 없도록 하여 적절한 타협과 양보가 이루어지도록”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TV 수신료 분리징수가 “철저하게 미디어를 정치적 도구로 인식”한 결과라고 비판하면서도 “재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공영방송을 다운사이징 하자는 얘기가 진보 쪽에서 나오는 걸 가장 경계한다”면서 “새로운 방향에서 재원을 확보하고 그런 재원 속에서 공영방송을 큰 틀에서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수영 위원은 “‘수신료=공공성’, ‘광고수익=상업화’라는 이분법적 논리는 수신료 제도의 정당성과 필요성의 근거로써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현실적으로도 100% 수신료 재원 구조는 불가능한 만큼, 공영방송/공공미디어의 다양한 재원 구성방식과 관련 제도 개편 등을 종합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칭 ‘공영방송재정위원회’를 제안하며 “다양한 재원 유형을 조합해서 공영방송의 건전한 재원 구조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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