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감 중 취재한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6월 항쟁 부싯돌 역할"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④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2019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5년을 맞아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사진 왼쪽) 등이 동아일보 앞에서 조선일보, 한국프레스센터까지 삼보일배 행진을 하고 있다. /이부영 제공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975년에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별였던 113명과 32명 언론인을 대량 강제 해직시켜 놓고 50년이 되도록 사과 한마디 없이 지내고 있다.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해도 명색이 한국을 대표한다고 스스로 내세우는 언론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그만 성냥공장도 아닌 언론 대기업이 입이 열 개라도 어떻게 변명하겠는가. 이 특권 족벌언론을 대상으로 해고무효소송을 해도 대법원을 비롯한 각급 법원이 우리에게 강요한 것은 패소 판결뿐이었다.

국가 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동아일보 측에게 화해를 권고했으나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정권과 사법농단 흥정을 벌이고 있던 양승태 대법원은 동아일보 측에게 승소를 안겨주었다. 당시 동아일보의 경영악화로 대량해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용훈 직전 대법원장이 인촌기념회(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의 유지를 기려 설립한 단체)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2005년 3월17일 강제해직 30주년을 맞아 동아투위 위원 30여명이 동아일보 옛 사옥 정문 앞에서 사과 요구 시위를 벌였다. /이부영 제공


1987년 민주항쟁의 부분적 승리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이후 10명의 대통령 시대를 살아왔지만 유독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양대 족벌언론은 민주화의 과실까지 가로채면서 민주사회의 최상위 포식자로 다시 군림했다. 이른바 민주 정권들까지 이들 사기업 족벌언론에 굴종하였다. 이 두 족벌언론은 해방 이후 신문을 복간할 때 일제 식민지배 시기의 친일부역에 대해 한 마디 사과 없이 다시 신문을 냈다. 오히려 항일했다고 거짓말했다. 이 두 신문은 중요한 정치적 계기마다 독재를 두둔하여 한국의 민주화에 역행했으며 남북화해에 찬물을 끼얹고 분단 대결을 조장해왔다. 광화문 한복판에 조선과 동아가 버티고 서 있는 한,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언제나 역풍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기업 ‘동아·조선 없는’ 세상에 살아보고 싶다.

창간 50주년 특집호 준비하면서 ‘동아 실체’ 파악

수습기자 생활의 중반을 넘어갈 즈음인 1969년 4월에 창간 50주년인 1970년 4월1일 특집판을 준비하는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사부에 비치하고 있는 창간호부터 당시까지의 동아일보를 모두 열람하여 나라와 민족에 대한 동아일보의 공헌을 찾아내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마이크로필름도 디지털 저장도 없었던 시절이라 일일이 찾고 메모했다. 우리 젊은 기자들에게 동아일보는 ‘반독재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민족지’로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언론인으로서 동아일보에서 일하는 것을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한국언론사 책 한 권도 없었고 동아·조선일보를 비판하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1975년 1월 중순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기자와 회견하고 있다. /이부영 제공


두 달 남짓 1920년 4월1일부터 1969년까지 동아일보를 열람한 뒤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알고 있던 동아일보와 일제 치하의 동아일보가 다른 신문이었고 해방정국의 동아일보도 민족지라면 할 수 없었던 분단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창간 직후 무장항일운동과 상해임시정부를 깎아내리면서 자치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거나 사주 김성수가 일본군 참전을 독려하는 등 중일 전쟁 이후 사례, 해방 후 모스크바 3상회의 가짜보도 등 몇 가지는 내게 큰 충격을 주었고 조용히 수습 11기 동기생들과 논의했다.

다만 1951년에 부통령에 당선된 사주 김성수가 이승만의 권력욕 때문에 일어난 부산 정치파동에 항의하여 부통령직에서 사임하면서 동아일보가 이승만에 대한 격렬한 비판논조를 펴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아일보는 4·19 혁명에 이르기까지 반 이승만 논조를 펴면서 한국의 야당지로 부동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면서도 조봉암 사형 등에는 냉담했다. 이렇게 동아일보에 대한 과대한 착시현상이 일어났으며 나 자신도 착시의 포로가 돼 있었고 뒤늦게 환멸감에 시달려야 했다.

2023년 6월10일 서울시청 동편 도로에서 열린 32회 민족민주열사 범국민추모제에 참석한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위원들. 사진 오른쪽부터 고 송건호 선생 영정을 들고 있는 이부영, 고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 영정을 든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 고 리영희 선생 영정을 든 신홍범 조선투위 위원, 고 정태기 조선투위 위원장 영정을 든 성한표 조선투위 위원장 /이부영 제공

동아일보 노조 설립, 자유언론실천운동 그리고 문화부

동아일보 문화부에 바치는 나의 헌사를 빼놓을 수 없다. 동아일보 노조와 자유언론실천운동에서 문화부 구성원들은 헌신적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우리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들도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훈 부장 한 분을 제외하고 전 부원들이 참여했고 해임되었다. 권영자·장윤환·김병익·서권석·이길범·홍휘자·이부영·심정섭 등 여덟 분이다. 권영자 차장(수습 1기)은 1974년 3월 동아일보 노조 창립 때부터 함께했다. 1975년 3·17 대량해임 이후 즉시 발족한 동아투위 초대 위원장도 서슴지 않고 맡아주었고 6개월 동안 계속된 회사 앞 도열시위에 앞장섰다. 권력의 탄압으로 야기된 백지광고와 대량해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의 사기를 다독이면서 이끌어준 큰 언니의 소임을 감당해주셨다.

동아일보 노조가 조합원 수를 늘려가는 과정에서 민청학련 사건 등 유신 폭압에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는 현실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면서 누가 자유언론운동의 대표주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고심하게 되었다. 몇몇 선배들이 거명되었으나 문화부에서 연극·영화를 담당하는 장윤환 수석기자로 논의가 모아졌다. 마침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이 교체되어야 했으므로 장윤환 선배(수습 3기)를 추대하기로 했다.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운동은 장 선배의 리더십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때까지 ‘언론자유 선언’이 되풀이 발표되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장 선배는 자유언론을 ‘실천하자’는 투쟁을 제안했다. 수습 3기 선배의 결기 앞에 후배들은 숙연하게 따랐다.

3월16일 서울시청 앞 촛불집회에서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 왼쪽은 김동현 동아투위 위원, 오른쪽은 신홍범 조선투위 위원. /이부영 제공


자유언론실천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무렵, 한국기자협회(기자협회) 회장이 유신정권의 부처 대변인으로 내정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기회에 기자협회도 바꿔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동아일보의 문학담당 기자로 이미 문학계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김병익 선배(수습 6기)에게 부탁드리기로 했다. 같은 문화부에 일하는 후배였기에 내가 김 선배의 의중을 타진했다. 김 선배는 의외로 선선히 받아들였다. 기자협회 부회장에는 나의 대학 동기인 조선일보의 백기범과 중앙일보의 홍사덕에게 응낙을 받았다. 기자협회 회장단이 드림팀으로 구성되었다. 언론계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자유언론실천운동은 기자협회도 쇄신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서권석 선배(9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종교계를 담당했던 서 기자는 이미 유신이 시작되면서 반유신 종교계 움직임을 취재하고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리자 신문에 나가지 않아도 미리 취재 노트를 만들었다. 명동성당과 기독교회관의 인권기도회를 취재, 민청학련 사건의 내용과 인권탄압을 고발하는 기사를 써서 10·24 선언의 기폭제 노릇을 했다. 이길범 기자와 홍휘자·심정섭 여기자들도 정성껏 돕고 참여했다. 정자환 선배(수습 6기)도 기억에 남는다. 미국 하와이대에 유학 중인 1974년 초에 귀국하여 문화부에 잠시 복귀했는데 동아일보 노조가 발족했다. 노조 간부들에 대한 무더기 해임이 일어났고 1차 대책위원회도 다시 해임 무기정직 처분을 받았다. 정자환 기자는 2차 대책위에 이름을 올렸다. 다시 유학길에 올라야 할 정 선배가 선뜻 대책위에 이름을 올린 것을 잊지 못하겠다.

3월16일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위원들이 ‘강제해직 49년 동아일보·조선일보는 사죄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이부영 제공


나는 수습 11기로 1972년 후반에 문화부에 합류했다. 국제관계 학술회의와 대학신문을 취재했고 인권변호사와 참여계 문학인들을 취재했다. 김병익 선배가 후일 문학과지성 계열의 문인들을 담당했다면 나는 창작과비평 계열의 문인들을 많이 만났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을 청진동에 있던 이문구가 편집을 담당한 <한국문학>에서 시작했으므로 동아의 자유언론운동과 거의 동시에 진행됐다. 나는 동아일보 노조의 섭외부장으로 일한 탓으로 자유언론실천운동에서도 대변인으로 일했다.

대변인 활동으로 박정희 독재에 미운털

광고 탄압과 사내 농성 그리고 대량 해직사태로 이어지면서 많은 외신기자들이 동아일보 편집국으로, 회사 밖으로 찾아와 내가 브리핑해주고 인터뷰를 해야 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뉴욕타임스의 리차드 헬로런 등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주로 서방 언론 대기자들의 취재요청에 응해야 했다. 오버도퍼 기자는 한 페이지에 이르는 장문의 논설기사에서 “정보기관이라는 유령이 동아일보에 출몰하고 있다…”는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을 인용하는 글을 남겼다.

후에 프레이저 보고서로 유명해진 도널드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 그리고 AP통신의 존 로더릭 부사장을 만나 브리핑한 것으로 박정희 정권에게 두고두고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다. 후에 민주화운동에서 활동하게 될 종교인, 인권변호사 , 문화예술인, 학자들을 폭넓게 알게 되었다. 동아 문화부는 노조 설립과 자유언론실천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그 중심 역할을 했다. 동아투위 위원들은 내가 점잖은 문화부를 오염(?)시켰다고 ‘진반농반’을 했다.

2023년 7월 뉴스타파 옥상 정원에서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위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이부영 제공


대량 강제해직이 일어나기 직전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중형을 받았다가 풀려난 김지하 시인이 동아일보에 옥중수기 ‘고행-1974’를 3회 시리즈로 실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처가인 정릉의 박경리 작가 댁에 머물고 있던 김 시인을 나와 장윤환 선배가 함께 찾아가 소주를 마시면서 원고를 직접 쓰도록 했다. 인혁당 사건 사형수 하재완씨가 고문으로 조작된 인혁당 사건에 대해 폭로하는 진술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 수기를 쓴 김 시인은 무기징역형을 복역하다가 나왔다. 아무리 중요한 기사라도 김 시인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했어야 했다. 김 시인은 곧바로 재수감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 시인을 사형시키려 들었다. 나는 강제해직 직후 구속되었지만 나의 재판보다 김 시인의 운명에 더 마음을 써야 했다.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양심선언’이 여러 동지들 노력으로 성사되어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진실 보도보다는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제축출 이후의 몇 가지 단상들

1975년 3·17 대량 축출 사태 직후에 신문과 방송 제작에 어려움이 닥치자 여러 갈래로 축출당한 동아투위 위원들을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김병관 광고부국장(김상만 사장의 장자)과 친분이 있는 김상현 국회의원이 김 부국장을 만난 다음 나를 만나 이렇게 전했다.

“이부영을 비롯한 성유보·박지동·심재택 등 4명을 제외하고 모두 복직시킬 의사가 있다고 하는데 어떤가?”나는 “즉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꼭 성사시켜달라”고 했다. 나는 김상현 의원의 낙관론이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김상만 사장은 박정희와 중앙정보부 의사를 거역해서 축출 언론인들을 복직시킬 수 없다고 봤다. 이들이 복직하여 자유언론을 주창할 경우 화근을 다시 키우는 것으로 볼 것 아닌가. 박정희 독재가 끝나기 전에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1979년 10·26 사태 이후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두 번째 구속되었다. 유신의 주인공이 죽었으니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해직 교수, 언론인과 제적학생들을 원상회복시키라는 요구였다. 당연한 요구를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구속이었다.

군사재판을 받으려고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으면서 김재규 사건의 공범 박선호 의전실장을 내가 아는 구치소 간부를 통해 1980년 1월 하순쯤 비밀리에 만났다. 대통령 살해 사건의 사형수를 만나게 하는 건 그 간부로서도 모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박선호씨를 만나 우선 그의 손을 잡고 의거에 감사한다고 인사했다. 시간이 급해서 용무를 말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책상 위에 현안 문서철로 동아투위 문서철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분명히 있었다고 했다. 10·26 이전에 한꺼번에 10명이 구속되었으니까 중요한 현안(懸案)이었다는 것이었다. 꽤 두꺼운 서류철이었는데 김상만 사장이 정부에 제출한 각서가 있었다고 했다.

“… 다시는 불미한 일이 없도록 서약합니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광고탄압을 풀면서 김 사장으로부터 서약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박선호씨는 1980년 5월26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 집행으로 세상을 떠났다.

언협·민민협 참여 결정, <말>지 발간

1981년 나는 대구교도소에서 야만적인 삼청교육을 받고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박정희 독재가 끝나도 복직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나서 군사독재정권이 종식되고 민주화가 성취되어야만 언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우리 해직 언론인들은 유신독재 기간 야당 혹은 야당 정치인들과 연대하는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언론인은 정치적 성향을 가진 민주화운동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처신했다. 5·18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 군사독재를 물리치자고 벌이는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비롯해 동아·조선투위 몇 사람들이 참여 쪽으로 기울었다. 1984년 초 노동, 농민, 문화예술, 종교, 교수, 교사 등 조직 중심으로 결성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에 김승훈 신부, 김동환 목사, 이부영 3인이 공동대표로 나섰고 이부영이 상임대표로 일하게 되었다. 언론계에는 동아·조선투위,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80년해언협) 등 3개 그룹이 있었지만 민민협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 1984년 봄에 신홍범(조선투위), 김태홍(80년해언협), 이부영(동아투위), 성유보(동아투위) 4인이 후배 몇 사람과 하남 검단산 산행을 함께 했다. 여기서 3개 단체와 출판인들이 합쳐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를 결성, 민민협에 가입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언론인 단체가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언협의 위원으로 민민협의 상임공동대표가 됐다.

전두환 신군부가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진압한 뒤에 1983년부터 전국 대학가에서는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은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차고 넘쳤다. 언협은 매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해언협 등 언협 내부에서 분담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그럴 만큼 여유가 없었다. 1984년 나는 기독교방송 사장 김관석 목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언론 사정을 말씀드렸다. 며칠 뒤 김 목사는 적지 않은 금액인 200만원을 건네주었다. 언협 사무국장으로 <말>지 준비를 하고 있던 성유보 씨에게 전달했다. 편집실 마련 비용과 제작비였다. 당시에는 비용의 출처는 말하지 않았다.

1986년 <말>지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하여 신홍범, 김태홍, 김주언(당시 한국일보 기자) 등 세 언론인이 구속되었다. <말>지에 대한 폭발적 호응은 새 언론에 대한 전망을 갖게 해주었다. 민주화운동이 고조되면서 서점에서도 <말>지가 팔리게 되었다. 그 뒤에는 제작비용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1985년 12대 총선을 계기로 강경 야당이 등장하고 민주화운동이 결집하면서 직선제 개헌이 중심과제로 제기되었다. 재야중심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 집결되었다. 나는 문익환 의장, 계훈제·백기완 부의장을 모시고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동아투위에서는 성유보, 임채정, 김종철 위원이, 조선투위에서는 최장학 위원이, 출판인으로는 김승균 일월서각 대표가 참여했다. 민통련은 전국적 조직망을 통해 각지의 선명 야당 세력과 연대하여 직선제 개헌운동을 벌였다. 광역시도의 야당 시당에서 직선제개헌 추진본부 현판식을 개최하면 민통련은 해당 지역 민주화운동 세력을 집결시켜 자연스럽게 집회와 시위를 만들어냈다. 남부 지역부터 북상하여 인천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진 후 서울로 집중하려 했다.

1986년 5·3 인천 직선제개헌투쟁을 전두환 정권은 대대적인 용공조작으로 탄압했다. 민통련을 배후조종한 세력으로 몰아 짓밟았다. 나는 6개월 동안 도피했다가 검거됐다. 이번에도 성유보 위원이 민통련 사무처장으로 굳게 지켜내 오히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로 발전시켜 6월항쟁의 구심체 구실을 해냈다. 나는 영등포교도소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은폐조작 사실을 취재하여 6월 민주항쟁의 부싯돌 노릇을 했다. 이 전말은 다른 기회에 자세히 기술할 것이다.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과 아내 손수향. 2018년 10월 초 필자의 장모 고 박기숙 교수 성묘 길에서. /이부영 제공

마지막 재야 전민련, 시민운동… 마음의 고향은 언론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대통령 선거를 김천교도소 안에서 지켜봤다. 6·29 선언 이후 정치범 석방에서 제외돼 대통령 선거 패배 과정을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다. ‘양김’분열과 감옥 안 젊은이들의 NL vs PD 논쟁을 비교하면서 관찰하는 기회도 가졌다. 1988년 3월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기념 특별사면으로 풀려나는 감회는 씁쓸했다. 1968년 삼선개헌 이후 계속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20년 투쟁이 패배로 끝난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한겨레신문 창간운동은 대선 패배의 충격을 딛고 일어서서 “민주화운동은 한판 승부가 아닙니다”(강정문 동아투위 위원의 카피)라는 국민모금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고 있었다. 19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 창간에 초청받아 갔다. 창간 일원으로 서 있어야 할 나 자신은 손님이었다. 내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꾸준히 새 언론 준비를 해온 언협 주축 멤버들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해냈다.

재야민주화운동 진영은 대선 패배 후유증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88올림픽과 탈냉전시대의 흐름은 한반도에도 전환의 바람을 일으켰다. 재야 민주화운동은 1989년 초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으로 결집하여 다시 나를 소환했다. 대선 현장에서 어느 쪽으로든 가담하여 책임 소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세력들은 타협의 산물로 나를 상임공동대표로 불러내려 했다. 아직 국가보안법이 그대로 있고 군사독재 끝물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 전민련 운동은 낡은 냉전시대의 속죄양 운명을 면할 수 없었다. 문익환 목사의 1989년 4·2 남북 평화공존선언 사건,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대파업 속에서 나는 다시 다섯 번째 투옥을 겪어야 했다. 어찌 보면 냉전시대 마지막 재야운동의 소임을 감당한다는 의미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의 고향은 언론에 머물고 있었다.

나의 정치참여는 다른 기회에 다뤄볼 생각이다. 나는 2003년부터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동북아평화연대(우스리스크고려인문화센터설립추진위원회), 동아시아평화회의, 한일협정재협상국민운동본부, 그리고 최근에는 전국비상시국회의 등 시민운동에 허기진 사람처럼 관여해왔다. 나의 정치참여에 대한 불만과 언론계 미복귀를 시민운동 참여로 갚으려는 듯했다.

그리고 2017년부터 동아투위와 자유언론실천재단에 복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올해는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이 되는 해다. 지금 50주년 기념사업이 진행 중이다. 동아일보 노조와 자유언론실천 운동에 투신했으니 50주년 마지막 기념사업까지 정성을 다해보려고 한다. 50주년 이후에는 탈 없이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간단히 살펴본 속절없고 부산한 나의 평생을 옆에서 지켜온 아내 손수향님에게 고개를 들 수 없다. 1973년 장준하 선생을 대부로, 천관우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했다. 1975년 3월17일 해직되었고 6월에 구속되었을 때에는 한 살배기 딸과 막 태어난 아들이 딸려 있었다. 그리고 2년 7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다. 때로는 아이들을 업고 안고 나를 면회 왔다. 돌아온 집은 천관우 선생댁 부근의 불광동 전셋집이 아니라 종로구 청운동 10평짜리 청운아파트였다. 두 어린아이가 딸린 사람에게는 사글셋집을 주지 않아 아껴서 연탄 때는 아파트를 샀다고 했다.

나의 친구들은 이부영이는 감옥에 가 있어야 재산이 늘어난다고 놀렸다. 부산에서 대학교수직에 계시던 장모님은 주말 토요일에 상경하시어 아이들과 놀아주시고 일요일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우리 가족이 견디어낸 것은 오로지 장모님 덕택이었다. 정년퇴직하신 뒤에는 우리 곁에서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장모님 기일인 10월 초에는 지금도 양평 수목장림으로 성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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