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트라우마 고위험군… 언론사 차원의 상담시스템 필요"

'언론인 트라우마 가이드북1.0' 발표… 전문가 제언 들어보니

“언론인은 트라우마 고위험군입니다.” 지난 1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언론인 트라우마 가이드북1.0’ 발표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언론인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한국기자협회·한국여성기자협회·방송기자연합회가 구성한 언론인 트라우마 위원회와 공동연구를 한 안현의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언론인들이 트라우마 고위험군인 이유는 단순히 관찰하고 보도하고 기록하는 직업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트라우마 사건에 일상적이고 반복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직 기자 12명을 대상으로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진행해 언론계의 트라우마 실태를 진단한 안 교수는 “참사를 경험한 소방관이나 구조요원들이 심리적 후유증을 겪을 거라는 사회적 공감대는 있지만, 언론인들이 트라우마 고위험군이라는 생각은 심리학계에서도 지난 20년간 하지 못했다”며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 교수는 유네스코 캠페인 슬로건 ‘진실을 알려면 진실(언론인)을 보호해야 한다’를 언급하며 “언론인의 트라우마를 (고질적인) 심리적 문제로 만들지 않으려면 조직과 개인, 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성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가 구성한 ‘언론인 트라우마 위원회’는 구글 뉴스 이니셔티브·다트센터와 공동으로 지난 1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언론인 트라우마 가이드북1.0’ 발표회를 열었다. 트라우마 위원회는 이날 나온 전문가들의 제언을 반영해 이달 말쯤 가이드북 최종본을 배포할 예정이다.


문일경 KBS 보도본부 전담 상담사도 “언론인들은 트라우마에 취약하다”며 조직 차원의 체계적인 상담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문 상담사는 “기자는 일회성 재난 사건에 항상 노출돼있다. 큰 참사는 평소 덮어뒀던 취약성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한다”며 “수많은 사건·사고와 반복 외상이라는 대가를 받으면서 직업적 적응 기제를 만든 것 같다”고 진단했다.


문 상담사는 감정을 차단하는 적응 기제가 기자들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우려했다. 문 상담사는 “기자들처럼 경쟁적으로 견디다 보면 감정이 메말라가는 둔마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감정둔마는 고통에서 보호해주지만 긍정적인 감정도 차단하면서 삶의 생기와 활력을 빼앗아간다”며 “저연차들보다 5~10년차 기자들을 보면 눈에 띄게 메마르고 피폐한 느낌이다. 이들이 조직 안에서 쉽게 전문가를 만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심리상담이 변화와 해결의 첫 단추는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노성철 일본 사이타마대 경제학부 교수는 공채제도부터 수습 교육, 능력주의 문화 등 뉴스룸 조직 자체가 트라우마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방송사 보도국 조직 체계를 연구해온 노 교수는 “보도국에선 위계조직의 논리, 시장제도의 논리, 언론으로서의 논리가 일상적으로 충돌한다. 3가지 논리를 저글링하는 과정에서 많은 심리적 갈등이 나타난다”며 “공채 순혈주의와 비체계적이고 폐쇄적인 조직문화, 불합리한 인사제도에서 발생하는 갈등 양상이 기자들에게 외상 경험과 심리적 불편감을 준다”고 말했다.


박재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사후 대응에 앞서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취재·보도 관행부터 바꿔야 한다고 했다. 참사 현장에서 발생하는 트라우마를 예로 들며 인터뷰 관행을 꼬집었다. 박 교수는 “부장들이 현장 기자에게 자극적인 코멘트를 따오라거나 특이한 사례를 찾아오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며 “부장이 만족할 만한 빛나는 코멘트, 굉장히 자극적인 사례를 찾으려다 무리하게 된다. 이런 관행은 취재원칙을 어기는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취재의 1원칙은 관찰이다. 우리 언론이 원칙을 안 지키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기자들의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이라며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관찰에 소비하면 무리하게 인터뷰하지 않아도 참사나 재난의 실상을 더 실감 나게 보여주는 좋은 뉴스를 만들 수 있다. 현장 기자들의 트라우마 역시 줄어든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결국 언론계 트라우마는 기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에디터(부장)의 문제”라며 “트라우마 가이드북을 활용해 에디터가 교육을 받아야 인식 전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했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는 언론이 기자들과 사회 전반의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으려면 ‘공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정 이사는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영향에 대해 이해하고 고통을 겪는 동료에게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라며 “지난해 이태원 참사 당시 트라우마 예방에 관심 두는 언론을 보며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트라우마에 공감하는 언론이 되려면 조직이 언론인 개인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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