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기자가, 마감시간을 당겨달라 해선 안 된다"

[인터뷰] 선우정 조선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신임 편집국장으로 선우정 논설위원이 지난 17일 임명됐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직의 의미는 남다른 데가 있다. 국내 최대부수의 신문이고 언론계, 정치권에서 영향력이 매우 커서다. 여기 ‘조선일보 최초 부자(父子) 편집국장’, ‘반 세기만의 비서울대 편집국장’이란 타이틀이 붙는다. 그는 소설 ‘불꽃’으로 알려져 있는 고 선우휘 조선일보 주필·편집국장·논설고문의 아들이고,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입사 후 도쿄 특파원, 주말뉴스부장, 국제부장, 논설위원, 사회부장, 뉴스총괄에디터 등을 거친 길은 ‘경제부’나 ‘정치부’ 라인이 주로 편집국장을 맡아온 궤에서 벗어나 있기도 하다.


언론 산업이 위기를 맞은 시기, 조선일보의 고민도 이 자장 밖에 있을 순 없다. 편집국 수장에겐 신문을 잘 만드는 데서 나아가 ‘디지털 전환’을 위한 대응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내부에선 ‘저녁이 있는 삶’, ‘조직문화(언어폭력) 개선’ 요구도 나오는 상황이다. 기자협회보는 지난 24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 사옥 4층 편집국장실에서 선우정 편집국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32년차 기자’이자 ‘칼럼니스트’로서 소회, ‘편집국장’으로서 목표와 최근 부장단 인사 및 조직변화 의도, 신문 중심 체제, 디지털 전환 구상 등을 물었다. 아래는 일문일답.

선우정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지난 24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 사옥 4층 편집국장실에서 기자협회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부자(父子)가 편집국장을 한 첫 사례, 반 세기만에 나온 비서울대 편집국장 등 의미가 있는데 취임 소감은?
“제가 편집국장이 됐을 때 정말 기뻐해 준 분들이 있는데 조선일보 퇴직한 선배님들, 그러니까 저희 선친하고 인연을 맺었던 분들이 있다. 그리고 대학 선배들 중에 ‘소원 풀었다’는 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특정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책임을 맡기는 회사가 아니다. 실력만으로 됐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당연히 편집국장 아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책임을 맡기는 회사도 아니다.”

-“기자 하지 말라”는 아버지 유훈과 달리 기자를 했는데 소신이 있었던 건가.
“기자에 대해 엄청난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버지를 통해 사명감을 키우면서 ‘내가 꼭 기자가 돼 대를 이어가겠다’ 생각을 한 적도 없다. 대학을 졸업한 게 1991년이었는데, 민주화 직후였던 그때가 언론의 전성기였다. 힘도 세고 인기가 많았을 때여서 누구나 한 번씩은 언론사 시험을 쳤었다. 인문학 전공이었고 그때 유행에 휩쓸려 들어와 어쩌다보니 편집국장까지 된 거다.


아버님 때는 기자가 너무 어려운 직업이었다. 잘못 쓰면 두들겨 맞고 구속까지 되기도 했으니 ‘너는 기자 하지 말라’고 하셨던 거 같다. ‘교수가 돼라’고 했고 저도 (대학 전공을 살려) 역사학 교수를 목표로 석·박사를 하려고 했었다. 제가 19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기자 정신 같은 얘기를 아버지에게 들어본 적은 없다. 그냥 좋은 아버지였다.”

신문이 온전해야 인터넷도 가능... 회사에 앉아있는 시스템이 문제

-기자를 하면서 아버지 영향을 느끼거나 그림자가 너무 크게 와닿은 적은 없었나.
“아버지는 조선일보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언론인이었지만 제 성격 자체가 남의 시선을 별로 신경 안 쓰는 스타일이라 할 걸 못한다거나 부담감을 가진 적은 없다. 수습 때 마와리(순회 취재)를 돌며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둘까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망신 시키지 말고 조금만 더 있으라’고 해서 조금 더 있어본 게 30년이 지났다. 아버지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 순간이라면 순간이다. 수습을 마친 후엔 기자가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다니게 됐다.


시간이 갈수록 이전에 읽은 아버지 칼럼이나 소설이 제가 글 쓰는 데 엄청나게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느낀다. 초년병 기자 때는 그렇게 영향을 많이 안 받았는데, 나이를 먹으며 보수적으로 돼 가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때 아버지가 썼던 글, 논조 등이 점점 더 이해, 공감이 되고 영향도 많이 받는 것 같다.”

-취임사에서 언론 위기의 본질을 ‘콘텐츠의 위기’로 규정하면서 “늘 신문이 잘 돼야, TV가 잘 되고, 인터넷도 잘 된다”는 사장의 발언을 언급했는데 어떤 취지인가.

“조선일보는 신문에 대한 노력을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하는 회사다. 신문이 온전해야 인터넷도 가능하고 TV도 가능하다는 사장님 신조가 나는 맞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 쓴다고 기사가 저질화 되는 건 아니지만 제목의 단어 하나, 배치 하나, 크기 하나를 12시간 이상 고민해 다음 날 내는 신문 제작 과정과 비교할 순 없다. 그렇게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가꿔나가는 과정이 결국 고급화라고 생각하고, 그런 콘텐츠가 나중에 유료화에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뉴욕타임스가 유료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통시장 개척도 잘했지만 근본적인 건 기사의 질을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론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저질화 흐름에 휩쓸려 가면 유료화 시대가 열렸을 때 아무 것도 팔아먹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최근 노조에선 ‘저녁이 있는 삶’ 요구와 더불어 신문제작 최종 마감 시간을 당기자, 닷컴 대응으로 대체하자는 말이 나오는데 반대하는 건가?
“내가 입사를 했을 때 최종 마감이 새벽 3시 반이었고 몇 천부는 찍었다. 신문에서 속보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독자들이 대개 신문을 받아보는 시간이 오전 6~8시 사이인데 새 정보를 담은 뉴스 마지막 제작 시점이 밤이 아니라 전날 저녁이라면 그 신문이 뉴스로서 무슨 가치가 있는지 묻고 싶다. 불과 몇 시간 차이에 무슨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 시간만큼의 가치라고 답하겠다. 오전 6시에 받아보는 신문을 우리가 오전 5시까지 만들 순 없지만 적어도 그 시간을 늘리지 않으려는 노력은 있어야 하고, 적어도 기자가 (최종 마감 시간을) 더 당겨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자들의 불만은 꼭 마감 시간 때문은 아니고 쓸데없는 야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낮 시간에 비효율적인 게 많은데 30년 전 그대로의 방법, 시스템으로 반복되는 부분이 있다. 속보를 처리하기 위한 야근은 어쩔 수가 없지만 그 뉴스를 기다리기 위해 주야장천 새벽까지 회사에 앉아 있는 시스템은 고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요즘은 집에서 다 해도 되니까 그런 야근을 줄이고 효율화 하는 건 정말 동의하고 많이 바꿔나가려 한다. 그렇지만 마감 시간을 당기는 건 이 회사가 경영적 문제로 마감 시간을 줄이기 전까진 기자가 줄여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신문에 조직 역량이 집중되면 불가피하게 기자들의 디지털 관련 시도나 노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동의한다. 점점 온라인 쪽으로 시프트가 되는 흐름은 당연하다. 그쪽으로 지속적으로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우수한 자원을 계속 더 투입할 거다. 하지만 디지털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신문을 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논리엔 동의할 수 없다. 온오프의 차이일 뿐 콘텐츠는 똑같다. 어디에 게재하든 편집국이 중시해야할 최고의 가치는 콘텐츠의 질이다.


신문 품질을 보존하며 디지털로 가야하는데 저희 문제는 신문 독자를 위해 쓴 기사가 다음날 아침 인터넷에서 사장되는 것이다. 인터넷에 기사를 먼저 쓰고 지면에 실어도 되고 어떤 신문에선 이게 우선일 수 있다. 그쪽으로 계속 가겠지만 우린 신문 중심 체제이고, 정성스럽게 쓴 게 디지털로 전달되는 자체가 지금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에 신문기사로 온라인에서 부가가치를 만드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밟고, 주를 인터넷으로 옮기는 식으로 서서히 가려고 한다.”

'저녁이 있는 삶', '비효율적 야근 개선' 등 요구가 담긴 최근 조선일보노동조합 노보 캡처.

-편집국장 임명 후 이른 시점에 부장 인사를 냈다. 상대적으로 젊은 부장들이 임명됐고, ‘데스크와 현장기자의 순환’이란 방향성을 천명하기도 했는데 어떤 생각인가.
“이번 인사의 핵심은 젊은 기자를 부장을 시킨 거다. 2003년 입사한 42기 2명이 부장(테크부장, 국제부장)이 됐는데 이하 연차가 부장을 맡은 회사도 많아서 일찍 발탁된 게 아니고 조선일보가 늦은 거다. 이 부장들은 영원히 부장을 할 수 없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간다. 데스크를 하면 자기 문장이 늘고 세계를 보는 시야가 넓어지지만 오래 하다 보면 현장에 나가 취재하는 데 두려움이 생긴다. 데스크는 밑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다. 필드에서 뛰는 진짜 정보를 가진 사람들과 접촉면이 줄어들어 전문성이 떨어지게 된다. 부장을 하다가 현장으로 가고 다시 부장이 되는 식으로 끝없이 순환해야 진짜 좋은 기자가 될 수 있다.


60세까지 정년을 보장하는 조선일보의 인력 구조상 부장을 3~4번하고, 논설위원으로 5~6년 있는 일은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현장에서 기사를 써야 한다. 미국이나 국내 몇몇 신문에선 나이 먹고 다시 현장으로 나가 기사 쓰는 일이 정착돼 있지만 우린 아직 그렇지 않다. 그대로 가면 기자 절반 이상이 데스크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런 조직은 존립할 수 없다. 진통이 있더라도 밀어붙이려 한다.”

부장 하다 현장 가고, 다시 부장… 끝없이 순환해야 ‘진짜 좋은 기자’

-정치부장과 사회부장은 유임했는데 이유가 있나.
“기존 부장들이 잘 해오기도 했고, 정치와 사회는 안정성이 굉장히 중요한데 다 바꿔버리면 조직이 흔들리고 무엇보다 제가 감당을 할 수가 없어서 유지했다. 정치부장이 37기인데 지금도 기수가 낮은 편이고, 사회부에선 법조팀장이나 시경캡 등을 바꿔줘야 하는 시점이 온 터라 부장까지 바꾸는 덴 부담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몇 개는 가져간 거고 특별한 뜻은 없다.”

-테크부를 신설하고, 에버그린콘텐츠부를 폐지하는 조직변화도 있었는데?
“에버그린콘텐츠부는 소수의 기자가 콘텐츠의 다양한 유통 경로를 개척하고 롱테일 기사를 생산하는 부서로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해왔다. 길고 복잡한 부서명이 국내에서 잘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출입처가 없다보니 힘도 없고 정체성이 불분명한 부서가 됐다는 생각에 조정을 했다. 폐지된 게 아니다. 이름을 ‘테크부’로 줄였고 인력을 늘려 확대 개편했다. IT나 과학 등 유료화에 전망 있는 요소를 갖춘 콘텐츠를 모아 신문과 뉴스레터, 유튜브 등 다양한 실험을 진행한다는 같은 취지 아래 출입처를 줌으로써 힘을 실어주려 했다. 출입기자를 상대로 정보를 공급하는 국내 현실에 적응시킨 걸로 보면 된다.


산업부를 예전처럼 1, 2부로 나누고 산업2부를 만든 걸로 오해할 수 있고, 에버그린콘텐츠부 소속원들은 ‘고아가 됐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아 내부에 공지를 올리기도 했다. 아직 인사가 나지 않았지만 기존 부서원 중 본인이 바라지 않는 경우를 빼면 모두 그대로 남게 할 생각이다. 테크부는 에버그린콘텐츠부를 계승한 거고 계속 강화해 나아가려 한다.”

-최근 노보엔 평기자 인사와 관련해 절차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담겼다.
“오늘(24일)로 (편집국장) 딱 일주일 짼데 같이 일해야 하는 부장 인사를 힘들게 했다. 일선 기자들 인사는 다음주 주말(기사를 업로드 하는 28일 기준으론 '이번 주말')까지 하려 한다. 젊은 기자들 얘길 많이 듣는 수밖에 없겠다.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부서에 갈 순 없지만 기회가 언젠가 간다는 걸 보여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일선 기자 중 같이 일해서 잘아는 사람은 전화로 물어보려 하고, 편집국을 떠나 있을 때 들어온 기자들은 아직 일주일 여유가 있으니 만나서 얘길 들어보려 한다.”

-취임사에서 “친절하겠다”, “다정하겠다”는 얘길 한 게 이례적으로 보였는데 어떤 배경이 있나?
"중견 기자가 됐을 무렵 담당 데스크가 엄청나게 가혹한 사람이었다. 원고지 10장을 써서 보내면 마음에 안 드는 거 다 자르고 3장 남겨서 ‘다시 10장 채워와’ 하며 강압적으로 대하는 스타일이었다. 중견 기자까지 나는 적응을 못하는 기자여서 취재하는 것도, 기사 쓰는 것도 어려워 했는데 억지로 끌려가면서 버틴 그때 제일 많이 배웠다. 데스크의 강압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고 한 발 더 나아갔다. 그게 내 역량이 됐다. 나 역시 데스크가 됐을 때 후배에게 그런 단련 과정을 거치게 하고 싶어서 굉장히 가혹하게 했다.


부장을 하면서도 오랫동안 그런 방식을 버리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아니었다 싶었다. 할 사람은 그렇게 안 해도 한다는 사실을 아주 늦게 깨달았다. 괜히 사람 마음에 상처만 주고 내 평판만 깎아먹었구나 생각을 많이 했다. 어리석었던 것이다. 편집국장이 됐을 때 ‘야, 이제 죽었구나’ 할 사람이 꽤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그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다. 실제로 그렇게 하려한다. 그때 나에게 당한 분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 분들에게 한 가혹함의 무용함, 무익함을 스스로 알게 됐기 때문이다.”

-꾸준히 기자들이나 노조에선 언어 폭력 등 조직문화 개선 요구가 나오는데 데스크들에 당부하고픈 말이 있나?
“언어 폭력은 이제 하면 안 되는 시대다. 차장급 이상들은 욕을 들으며 일하는 거친 문화에 숙달돼 있는 사람들이어서 저절로 나오는 측면이 있는데, 결국 자기 손해이기 때문에 점점 더 스스로 안 할 거라 생각한다. 제도적으로 이 부분을 정비할 생각이다. 성폭력 등이 징계나 처벌 등 조치 몇 번 후 완전히 없어졌듯 언어 폭력도 마찬가지가 되지 않을까 싶다.”

-국내 언론의 정파성을 말할 때 조선일보는 늘 거론되는 매체인데 이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저희 사시 중 하나가 불편부당이다. 어떤 한 주의주장에 함몰돼서 옳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하는 게 정파성인데, 이 기준으로 볼 때 저희 신문은 저희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옳다고 쓴다고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저희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그르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시각 차이일 거다. 여러 시각이 모여 국가의 어젠다를 결정하는데 그런 차원에서 저는 우리가 옳다고 하는 걸 끝까지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정파성이라고 본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 어떤 신문이든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 끝까지 옳다고 얘기하는 게 유지돼야한다는 생각은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저흰 기본적으로 보수를 선택한 신문이고 그 관점을 계속 유지할 거다.”

선우정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지난 24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 사옥 4층 편집국장실에서 기자협회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내년 총선을 치를 텐데 정치부장 경험이 없는 게 걱정되진 않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걱정하지 않는다. 선거 땐 굉장히 유혹도 많고, 독자로부터 ‘왜 지지하는 콘텐츠를 더 많이 안 내주냐’는 압력도 많아지는데 균형을 잘 맞춰서 가는 게 국장 업무라고 생각한다. 정치부장이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다 해본 베테랑이고, 제가 불편부당을 어기고 휩쓸리려고 하면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길 할 거기 때문에 든든하게 믿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유료화는 어떻게 추진할 생각인가.
“온라인에서 먹거리를 찾는 부분은 전 세계적으로 성공 사례가 많지 않고 다들 실험을 하는 과정이다. 국내에서도 여러 실험이 진행 중이고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에서도 기존 관련 조직이 있었고, 이번에 테크부를 신설했지만 회사 차원의 디지털 전략을 담당하는 경영기획본부 등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협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유료화가 열리고 유통 경로를 개척한다 해도 가치 없는 콘텐츠엔 누구도 돈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편집국으로서 가장 중요한 건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거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지 연구도 필요하다. 저흰 정치 콘텐츠가 강하다. 하지만 정치 콘텐츠를 콘텐츠 자체의 가치로서 사주는 경우는 드물다. 온라인에선 팬덤의 기부금이나 유튜브 유통망에 들어감으로써 분배받는 수익만 있다. 경제 콘텐츠가 가능성이 있는 분야이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테크부를 만들고 리소스를 많이 투입하면서 힘을 실어주려고 한다. 다만 조선일보는 종이신문이 주요 수익원이고 아직도 강고한 독자들이 있어서 이걸 포기하는 순간 우리 중심이 흔들리기 때문에 유지하면서 가야 된다는 점에서 타 신문사와 차이가 있다. 쉽게 디지털로 시프트할 수 없지만 여기 매달리는 과정 자체가 나중에 유료화 시장에 대비해 우릴 단련시키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조선일보에선 ‘2030 팀장’ 모집을 했다가 아무도 나서지 않은 일이 있었다. 디지털 전환에선 기자들의 참여가 중요한데 책임이나 권한, 동기부여, 보상 측면에서 해줄 말이 있을까.
“2030 팀장 모집이 실패한 이유는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맨바닥에 와서 너가 기획해서 사람도 뽑아서 해봐, 이러면 낙동강 오리알이 될 게 뻔한데 무서워서 누가 한다고 하겠나. 결국 힘을 실어 줘야하는 문제인데, 예를 들어 팀을 만들 거고 출입처도 다 쏟아줄 테니 한번 공모해봐라 했으면 많이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보상에 대해선 말씀드릴 수 있는 권한이 제게 없다. 기자가 돈을 많이 받던 호시절이자 비정상적인 시대가 있었지만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기자는 돈 때문에 하는 직업은 아닌 게 확실하다. 자기 콘텐츠에 보람을 느끼고 세상을 바꿔 나가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하는, 기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성과와 보람을 키우는 것말고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선우정 칼럼' 리스트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캡처.

-편집국장이 되며 ‘선우정 칼럼’을 쓰기 어려워졌는데 아쉬움은 없나. 조선일보에서 기명 칼럼 하나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되는 건가.
“2015년 1월부터 8년 정도 해왔는데, 당시 국장이 기명 칼럼을 만들어줬을 때가 편집국장 된 거보다 더 영광이었다. 글에 애착이 있었고 글은 쉽게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11매 짜리 칼럼을 쓸 때 10시간 이상 투자를 해왔다. 저는 속필도, 달필도 아니고 글의 천재가 아니라서 그 정도를 다듬지 않으면 좋은 글이 안 나온다고 생각한다. 기자 생활을 하며 칼럼을 쓰고 반응을 들을 때가 제일 즐거웠다. 악평도 많이 받았지만 내 글에 대해서 평가를 해준다는 것 자체가 기자로서 제일 큰 기쁨이지 않나. 그게 사라진 건 아쉽지만 국장이 끝나면 다시 칼럼을 쓸 거다. 회사가 허락하는 한 영원히 그러려고 한다.


조선일보엔 기명 칼럼의 역사가 쭉 있었다. ‘김대중 칼럼’, ‘강천석 칼럼’, ‘양상훈 칼럼’, ‘김창균 칼럼’ ‘박정훈 칼럼’ 등이 나오고 있는데 (제가 빠지면서) 제일 밑에 칼럼 하나가 없어진 거다. 달리 보면 지난 8년 간 후배 기명 칼럼이 안 나왔는데 능력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니라 칼럼니스트 후계자를 키우는 데 소홀했다고 보고 있다. 1967년생, 만 55세가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막내이고, 어떤 세계관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마지막 나이라면 저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이 대를 이어야 그 사람이 보는 세상과 세대의 주장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후배를 키워서 조선일보 칼럼을 풍성하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고 복안도 있다.”

정치 저질화되면 결국 나라 약해져... 총선 전 ‘국회 개혁’ 기획 꼭 할 것

-임기 중 이뤘으면 하는 목표가 있나. 특별히 관심 갖고 있는 어젠다나 기획, 이슈가 있다면?
“순차적으로 이동을 해서 편집국을 떠날 때 인터넷 중심이 됐으면 좋겠다. 인터넷에 실은 기사를 데스크가 그대로 잘라 신문에 집어넣어도 문제 없고 질적 유지에 문제가 없는 수준까지 됐으면 하는 게 소원이다. 신문의 좋은 기사를 인터넷에 우선 배치하고, 인터넷의 좋은 기사를 신문 지면에 넣어 서로가 일을 줄여주되 질적 저하는 안 되는 방향으로 점점 이동을 해서 ‘이게 인터넷 중심이구나’하는 걸 사람들이 느낄 쯤 끝냈으면 좋겠다.


총선을 앞두고 국회 개혁에 대한 기획은 꼭 하고 싶다. 언론사, 검찰, 법원 등 여러 조직에서 우수한 사람들이 가는데 이런 우수한 사람들이 모인 국회가 한국에서 제일 후진 집단이라면 큰 문제다. 정치가 저질화가 되면 나라가 망한다. 2005~2010년 6년간 일본에서 특파원을 하며 정치가 저질화 되면 나라가 필연적으로 약화된다는 걸 일본에서 실제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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