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마을 어귀를 돈다. 평생 배추밭을 일궈온 그는 이제 허리도, 손도 굽어 흙 한 줌 쥐기도 어렵다. 망망한 배추밭을 바라보며 내뱉은 한숨 같은 한 마디, “일할 사람이 없어서 어찌할꼬….” 안타까운 시선의 끝에 이주노동자가 있다.
요즘 농촌은 농부가 없다. 일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취재진의 발길이 닫는 곳마다 “지금 상황은 그야말로 전쟁이다”라는 울분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농어민들은 인력을 단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인력을 뺏고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제 오기로 약속한 인력이 오늘 아침 웃돈을 얹어준 옆 농가로 가버리는 현실, 이대로는 농업이 붕괴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어업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인력 전쟁 속에 흔들리는 농어업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른바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대한민국 먹거리 생산 현장 어디에도 불법 고용을 통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국적인 조직화… 미등록 이주노동 생태계
미등록 이주노동자 고용은 명백한 불법이지만, 농어업 현장에서 필수 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일자리 생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장 취재에 돌입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와 일터 등 음지에 숨은 불법 고용알선 현장을 찾아다니던 중 한 제보를 받았다. 비닐하우스에서 이주노동자 수십 명을 고용해 숙박비까지 받으며 농촌에 인력을 불법 알선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등록 이주노동 고용알선의 종합판이라고 할 만큼 현장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농업법인 간판에 비닐하우스를 세워놓고, 안에는 조립식 패널 수십 동을 들여 이주노동자 집단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칫 화재라도 발생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구조였다. 경기도 포천의 속헹씨 사건 이후 정부는 비닐하우스와 같은 불법 가설물을 숙소로 제공하는 농가에 이주노동자 고용을 제한했지만, 음지에서는 정부 지침을 비웃듯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불법 인력중개업은 국내 농수산업 인력 수요에 맞춰 전국적으로 조직화 됐다. 오히려 이 같은 불법 고용 알선이 농어업 맞춤형 인력 공급 방식으로 작동하는 부조리한 현실이었다. 필연적으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체불과 인권침해, 농어민을 울리는 인건비 상승의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었다.
이주노동자도 떠나는 농어촌… 불법 부추기는 법과 제도
농어촌에도 체류자격을 가진 외국인 근로자들은 있다. 고용허가제인 비전문취업(E-9) 비자로 일하고 있는 국내 외국인의 12%가 농축산업에 배정됐고, 5개월까지 일할 수 있는 계절근로제도 있다. 그러나 합법 이주노동자마저 농어촌을 떠나고 있었다. 강원도 양구, 전남 나주, 충남 논산까지, 취재진이 가는 곳마다 이주노동자들이 하룻밤 사이 이탈했다는 농민들의 절규가 이어졌다. 열악한 농어촌 근로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일자리가 많은 제조업으로 향한 것이다.
고용허가제 등 법과 제도는 이주노동자 이탈과 불법을 부추기고 있었다. 농어업 5인 미만 미법인 근로자들은 근로기준법이 정한 휴게나 휴일 근로 규정에서 제외되고, 산재보험이나 대지급금(체불임금 일부 국가 지급) 적용도 받지 못했다. 발암물질을 사용하는지도 모르고 일을 하다 백혈병을 얻은 이주노동자, 수천만원의 임금을 못 받은 이주노동자 사례를 접할 때마다 농어업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 그 뒤에 숨은 대한민국의 민낯이 속속 드러났다. 국내 일자리를 알선만 해놓고 이후 문제는 책임지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 ‘악덕 브로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였다.
이주노동에 기댄 대한민국… “이제는 인정할 때”
농어촌 인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10년 안에 ‘밥상의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실제 이미 배밭이 사라지고, 딸기밭이 사라지고, 양식장이 문을 닫고 있다. 이는 곧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을 두고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에 기대어 농수축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대한민국, 공생을 위한 제도 개선과 인식 변화를 더 미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제 그만 인정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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