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 팔지 않고 묵묵히 35년… 기자가 천직이라는 '뼈기자'

[와이드 인터뷰] 이충재 한국일보 주필

해가 아직 다 뜨지 않은 새벽 5시35분. 서울역 앞 와이즈타워 1층에 들어서니 엘리베이터 한 대가 홀로 18층에 멈춰 있다. 옆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에 내려서니 환한 사무실을 쓸고 닦는 청소노동자 한 분만 눈에 들어왔다. ‘주필실’의 열린 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일찍 왔네요.” 칫솔을 든 슬리퍼 차림의 이충재 주필이었다.


이 주필은 매일 새벽 5시에 돈암동 집을 나선다. “첫 마을버스를 타고 첫 지하철을 타고 오면 이 시간”이다. 지난 3월 뉴스레터 ‘이충재의 인사이트’를 시작하며 원래 오전 6시에 하던 출근을 1시간 앞당겼다. 오전 7시 뉴스레터를 보내기 위해서다. “제가 일어나는 건 새벽 3시 반쯤 되거든요. 스마트폰으로 그날 종합일간지 사설과 칼럼을 다 읽고 나면 딱 5시쯤 되는데, 그때 출근하는 거죠. 와서 전날 절반 이상 써놓은 뉴스레터를 마무리하고, 비문이나 오·탈자가 없는지 보고, 7시쯤 보내는 거예요. 이거 하는데 하루 3시간 이상 걸려요. 보내고 나면 사실 하루가 시작되는 건데 지쳐버리죠.”

매일(월~금) 뉴스레터 제작을 위해 새벽에 출근한다는 이충재 주필의 하루가 궁금해 지난 6일 그의 집무실에서 이른 새벽과 오후, 약 4시간에 걸쳐 심층 인터뷰를 했다. 그의 자리 뒤편엔 ‘사설은 쉽게 써야 한다. 사설 제목은 시와 같아야 한다’는 백상 장기영 선생의 어록이 현판에 담겨 걸려 있었다.


기자 35년차면 뉴스레터쯤이야(?) 뚝딱 써낼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단순히 주요 뉴스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주필의 ‘인사이트’를 담아 “깊이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앵커멘트처럼 생각한다”는 200자 남짓의 오프닝 문단부터 ‘오늘의 화두’와 연결되는 명언록 ‘여는 문장’까지 허투루 할 게 없다.


“제목 재미없죠?” 옆에서 모니터를 훔쳐보는 기자에게 슬쩍 묻더니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까” 하며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여러 번 제목을 수정하고, 기사 링크가 잘 됐는지 확인도 하고, 그러다 “노안이라, 눈이 시려서…”라며 점안액도 한번 넣어주고, 사진 크기도 다시 보고, 모바일 미리보기도 하고,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보내기 버튼을 누른다.

-편집부터 발송까지 직접 다 하시는지 몰랐어요.
“이 시간에 누가 나와서 하겠어요. (웃음) 사전에 한 달 정도 코치를 받았어요.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해서 시작한 거죠. 이젠 툴 같은 것도 웬만큼 아니까, 혼자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요.”

-다섯 달이 지났네요. 할 만하세요?
“저는 아침잠이 없고 신문을 꼼꼼히 보니까 쉽게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쉽지 않아요. 내일 뉴스레터 뭐 쓰지? 종일 고민해요. 주 5일 쓰고 토·일은 안 하잖아요. 제일 즐거울 때가 금요일에 보내놓고 나서예요. 매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뉴스레터를 보내고 다시 신문들을 쭉 보고, 뉴스룸 기자들의 취재보고까지 확인하고 나면, 그때부턴 회의의 연속이다. 그는 한국일보 사설과 칼럼의 방향을 결정하고 논설실 조직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다. 편집국장에서 물러난 뒤 논설위원으로 만 8년을 있다가 지난해 7월 주필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뭔가 해보자’며 논설위원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사설과 칼럼만 쓸 게 아니라 인터뷰든 기획이든 자기 분야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면(面)씩 책임지도록 했다. 일만 시키고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었다. “나도 뭔가 해야 하지 않나 싶어” 생각한 게 뉴스레터였다. 얼마 전 환갑이 지난 그는 언론사 최고령 뉴스레터 필자다.


누구보다 일찍 아침을 시작해 긴 하루를 보내지만, 일과는 단조로운 편이다. 새벽 3시 반 눈을 뜨면서부터 밤 11시 잠이 들 때까지 회의할 때 빼고는 거의 신문과 기사만 들여다본다. 토요일 하루 쉬는데 그 날도 아침 일찍 산에 다녀와 회사에 들러 신문을 보고 아내와 함께 노모를 찾아뵙는 게 전부다. 골프도 안 치고, 술도 썩 즐기지 않는다.

-‘사생활’이랄 게 없으시네요.
“별로 없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있던 약속도 취소하는 판이라서요. 뉴스레터 시작한 뒤로는 저녁 약속이 꺼려지기도 하고요. 제가 원래 취미 이런 게 없는, 재미없는 스타일이에요. 매일 뉴스만 보고 있으니 책 읽는 시간이 부족한 게 오히려 안타깝죠.”

-‘아침형 기자’에 ‘저녁이 없는 삶’이네요.
“입사해서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이 부지런한 거라서요. 그거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항상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요즘 후배들 보면 글도 잘 쓰고 말도 잘 하고 생각 깊은 친구들이 얼마나 많아요. 지금도 후배들 보면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선배로서 뭔가 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년이 끝난 사람으로서 귀감까진 아니지만 싫은 소리 듣지 않도록 나름대로 이것저것 열심히 하려고 애쓰고 있죠.”

-주필이 너무 부지런해서 오히려 후배들이 부담스러워할 거 같은데요?
“안 그럴걸요? (웃음) ‘쟤는 원래 저런 애야’ 다 알고 있는 거 같아요. 후배들에게도 부지런함을 강요하지 않아요. 요즘 그랬다간 갑질한다고 욕먹어요. (웃음) 현역 땐 약간 그러기도 했죠. 그런데 ‘난 안 쉬는데 너희들은 왜 쉬냐’ 이런 게 이제 통하지도 않고, 조직 분위기만 해치고요. 논설위원들이 본인 할 일만 한다면 그 외는 터치하지 않습니다.”

매일(월~금) 뉴스레터 제작을 위해 새벽에 출근한다는 이충재 주필의 하루가 궁금해 지난 6일 그의 집무실에서 이른 새벽과 오후, 약 4시간에 걸쳐 심층 인터뷰를 했다. 그의 자리 뒤편엔 ‘사설은 쉽게 써야 한다. 사설 제목은 시와 같아야 한다’는 백상 장기영 선생의 어록이 현판에 담겨 걸려 있었다.


만 34년을 기자로 일했고, 정년이 지난 지금도 ‘현역 기자’인 그를 가리켜 후배들은 ‘뼈기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의외의 반전(?), 원래부터 꿈이 기자였던 건 아니라고. “솔직히 취직이 안 돼서요.” ‘서울의봄’에서 5·18로 이어지던 80년 대학에 들어간 그는 민주화 열망이 6월 항쟁으로 터져 나온 87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시대가 그러했던 만큼 사회적 약자나 불평등 문제에 당연히 관심이 있었는데, 1년 재수 끝에 기자가 돼보니 적성에 잘 맞았다. “언론의 민주화와 언론 역할에 제가 기자로서 얼마나 기여했나 생각해보면 약간 후회도 되고 회한도 있지만, 기자 일을 선택한 건 잘 했다고 생각해요.”


‘청년기자’ 시절을 물었다. “이건 내 자랑밖에 안 되는데…” 하면서 들려준 건 일명 ‘용팔이 사건’으로 불리는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이었다.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지구당 창당을 방해한 배후에 전두환 정권 안기부와 여당 의원이 있었음을 검찰청에서 2주간 먹고 자며 밝혀냈다. 경찰 기자만 5년, 크고 작은 특종을 하며 사건 기자로서 나름 명성도 쌓았다. “무용담이야 많죠. 그때만 해도 권력 감시 이런 건 많이 했지만, 사회 불평등과 양극화, 소외된 사람의 인권을 생각하는 기사들은 얼마나 관심을 두고 썼냐고 한다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임명동의투표에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으며 편집국장이 된 그가 ‘우리 시대의 고졸’, 양극화 해법을 모색한 ‘공생발전, 말잔치론 안된다’ 같은 굵직한 기획을 선보였던 것은 그 시절 마음의 빚 때문이었을까. 그가 편집국장을 맡은 뒤, ‘중도지’ 한국일보는 뚜렷한 색깔을 드러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국일보가 달라지고 있다> <이충재의 한국, 왜 강해졌나> 등 당시 한국일보의 변화를 주목한 기자협회보 기사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회사는 광고매출 부진의 책임을 물어 10개월 만에 그를 경질했다. 광고·협찬에 협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편집국장을 교체한다는데 기자들은 분노했다. 그때 가진 광고주의 압력과 편집권 침해에 관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그는 2015년 ‘종합일간지 편집국장의 편집권에 대한 인식 연구’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그때 경험이 어떤 의미를 남겼을까요.
“언론의 기본적인 가치보다 비즈니스 측면이 과잉 확대되는 건 걱정이지만, 기본적으로 언론의 존속을 위해 경영적 측면을 무시할 순 없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걸로 불이익을 받았지만 생각해보면 제가 그런 걸 너무 등한시했구나 싶고요. 콘텐츠를 잘 만들어 유료화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나 혼자만 고고하게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주필이면서 회사 임원이기도 한 지금은 어떤가요.
“비즈니스에 대해 부여받는 임무는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좋은 여건인데, 그래서 콘텐츠에 더 신경 쓰려고 하죠. 기본적으로 콘텐츠의 질을 높이자는데 굉장히 공감대가 서 있고, 경영진 생각도 확고해요. 방향은 괜찮은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일보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을 불편하게 하는 보도로 사회부장에서 잘리고, 편집국장에서도 잘리고, 논설실에만 8년을 넘게 있으면서 ‘그만둬야 하나’ 싶은 순간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사는 쓸 수 있다는 걸 그는 다행으로 생각했다. “지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일을 열심히 하자, 그렇게 생각했죠. 다행히 기회를 부여받았고요.” 그는 정년이 지나서도 ‘기자’일 수 있는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마누라도 그래요. 주필과 살아서 영광이라고. (웃음)”


35년째 기자를 하면서 해외연수는커녕 가족과 해외여행 한 번 다녀온 적 없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없고, 자녀 사교육에 돈 들인 일도 없다. 그는 “정말 몰라서 그런 거라 자랑할 일도 아니고, 누구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다”면서 “그래도 나는 잘 산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만 이렇게 덧붙였다. “기자들이 너무 잘 살아서요. 좋은 대학 나오고, 수입도 괜찮고요. 평균 이상의 삶만 기사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사회 평균적인 삶을 반영하는데 구조적으로 취약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라고 지금보다 더 나은 조건의 삶을 살 기회가 왜 없었을까. 정관계는 물론 다른 언론사에서 좋은 자리를 제안한 적도 있다. 하지만 모두 단칼에 거절했다. “잘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는 만 34년 동안 오직 신문사에서, 그것도 편집국과 논설실에서만 “거의 화석 같은” 삶을 살았다. 한눈판 적도, 딴생각 한 적도 없다. 편집국장에서 밀려난 뒤 대학원에서 석사 공부를 한 게 거의 유일한 딴짓이다. 신문밖에 모르는 ‘신문바보’. 그런 그가 여전히 건재한, ‘이충재 보유 신문’인 한국일보는 그와 함께 한 역사를 조금은 자랑스러워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졌다.

-은퇴 후 계획이 있으세요?
“여력이 된다면 봉사나 공부, 그림이나 서예 같은 취미 활동을 하고 싶어요. 또 다른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쪽으로 눈길을 돌리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주필이 영예로운 자리인데, 이걸 하고 나서 정치 같은 데를 기웃거린다든지 하진 않을 거예요. 능력만 되면 책도 쓰고 싶은데, 시력이 떨어지니 책 보는 것도 힘들어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다시 태어나도 기자를 하시겠어요?
“할 게 없어요. 마누라도 ‘당신 이거 아니면 굶어 죽었을 거야’ 이래요. 천직인 거 같아요.”

-기자여서 행복하셨나요?
“행복했고, 굉장히 복 받았다고 생각하죠. 기자 중에 편집국장과 주필을 다 한 사람은 한국일보 역사에서도 몇 안 될 거예요. 기자로서 누릴 최고의 영광을 다 누린 거죠. 다만 제가 언론계와 언론 발전에 얼마나 기여를 했나 생각해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별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게 회한인 거죠.”

-어떤 기자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다, 한눈팔지 않고 자기 일만 묵묵히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거면 되죠. 다른 거 바랄 것도 없고요. 그런 언론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기자들에게 당부 한 말씀 해주세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자가 생활인, 직업인이긴 하지만 공적책무를 가진 만큼 그 기대에 맞춰서 많이 노력해야 해요. 글이라는 건 상당한 권한이거든요. 요즘 많이들 글을 쓰지만 그래도 기자가 쓰는 글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굉장한 권한이에요, 의무가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기자라는 것이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끔 반성하고 고민하고 노력해야죠. 그러면서 전문성도 갖춰야 오래 살아남고, 대중으로부터 신뢰도 받을 수 있고요. 요새 업무량이 많아서 힘들긴 하겠지만, 그런 생각을 놓치지 말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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