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모녀가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했다. 살해 용의자는 현장에서 자해한 상태로 시신과 함께 발견됐다. 충격적인 사건의 경찰 수사결과는 언론을 통해 매일 조금씩 더 알려졌다.
수사권이 없는 기자들은 경찰의 발표를 좇아갈 수밖에 없다. 사건에 쏠리는 관심이 커지면서, 경찰이 피의자로부터 확보한 진술 하나하나가 기사가 된다. 24시간 속보를 쏟아내는 온라인 환경에서 취재 경쟁이 심할수록 기사의 파편화는 더 심해진다.
‘노원구 세 모녀 살해사건’으로 불리다가 가해자의 신상이 공개된 뒤 김태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사건. 사건의 첫 보도 이후, 앞다퉈 쏟아지는 후속보도를 보아내기 어려웠던 이유는 사건의 잔혹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시신 옆 엽기행각’ 김태현, 여고생에 신음소리…음란사이트 접속도>와 같은 온라인 기사 제목을 보고 있으면, 언론은 기사를 읽을 시민들을 관음증 환자로 보는가 반문하게 된다. 시민들은 살해 용의자가 피해자의 집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는지가 궁금할까. 그가 ‘업자’수준의 살인 기술을 휘둘렀다는 표현에 생생함을 느낄까. ‘엽기성’에 집중하는 이러한 보도 행태에서 피해자는 지워지고 가해자의 말과 행위가 서사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가해자 중심 서사의 이유를 육하원칙에 기초한 경찰 보도자료와 말단 현장기자의 취재 방식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사건 기사를 다뤄온 관행과 관점, 즉 데스크의 시각, 편집의 제목달기 등이 현장 기자들이 암묵지로 공유하는 매뉴얼이 되기 때문이다.
<‘세 모녀 살해 피의자’ 김태현, 내성적 성격에 게임 집착>이라는 프레임은 사건의 원인을 자칫 피의자 개인의 특성으로 환원해 버린다. 피의자를 사회부적응자 혹은 반사회적 괴물로 고정해 버림으로써 사건은 개인의 특수한 사례로 남는다.
무엇보다도 사건의 개인화는 이 사건이 가진 젠더적 특성을 지워버린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20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사건들을 분석한 결과,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되었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했던 사건이 1.6일마다 1건씩 보도된 것으로 나타났다. 젠더폭력은 그만큼 만연해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김태현 사건도 특이한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성차별적인 구조 하에서 빚어진 젠더폭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를 취재 보도 과정에서 질문해 보아야하지 않을까.
주목할 보도들도 있었다. JTBC는 피의자 신상 공개 후 사건의 이름을 ‘세 모녀 살해사건’이 아닌 ‘김태현 스토킹 살인 사건’이라고 정명(正名)했다. 스토킹 처벌법이 만들어졌지만 처벌을 위해서는 스토킹의 지속성, 반복성, 직접적 피해의 증명같은 까다로운 요건이 필요하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을 경우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해자로부터 끔찍하게 합의를 종용당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짚는 기사들이 김태현 사건의 속보 가운데 다수 보였다. 그러나 그런 기사들마저 ‘시신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와 같은 자극적인 보도들로 인해 빛이 바랜다.
김태현 사건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으로부터는 또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온라인과 현실 공간에서 끔찍한 여성 살해 사건들이 누적되고 있지만, 뉴스룸이 젠더폭력을 사회구조와 연결지어 다루는 방식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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