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만의 캐비닛을 만들어 뒀나요?

[언론 다시보기] 김하영 ROBUTER 편집장

김하영 ROBUTER 편집장

플랫폼 노동의 경험을 담아 2020년 11월 르포르타주를 한 편(‘뭐든 다 배달합니다’) 펴냈다. 사회 현상을 담은 책을 내다보니 몇몇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십 수 년 인터뷰어(interviewer)로만 살아오다 인터뷰이(interviewee)가 되어 보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사전에 질문지를 받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가 열 가지를 이야기해도 기자는 한 가지 주제를 뽑아내 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난 두서없이 신나게 떠들었다. 너무 중구난방으로 이야기해 인터뷰를 끝내고 나올 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인터뷰이는 말 하는 그대로 기사화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논리정연하고 기승전결 구조까지 갖춰서 기자가 별로 할 일이 없게 만든다. 기자 시절 이런 인터뷰이를 만나면 “오늘은 일찍 퇴근하겠군”이라며 신나서 사무실로 돌아왔고, 반대의 경우면 “오늘은 야근 확률 99%”라며 시무룩했었다. 나는 분명 후배 기자들을 시무룩하게 했음이 틀림없다.


한 번은 젊은 기자가 인터뷰 말미에 후배들을 위해 조언을 한 마디 해달라고 했다. 나는 “각자 자기만의 캐비닛을 만들어 두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때 ‘전문기자’가 각광을 받던 때가 있었다. 과학, 환경, 건축, 군사, 외교, 의학 등등. 평범하게 언론사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하다 특정 분야에 대한 관심이 생겨 스스로 한 분야를 파 전문기자가 되기도 하고, 변호사나 의사 등 특정 자격증을 가진 이가 특채되기도 했다. 전문기자가 갖는 장점은 많다. 특정 이슈, 특히 전문화된 분야에서 깊이 있는 취재와 보도를 할 수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의제의 다양성 증가에 기여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전문기자에 대한 언론사들의 관심이 덜한 것 같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유튜브까지 다양한 미디어 채널이 있어 전문가들이 이미 저널리스트처럼 활약하고 있기에 과거에 비해 전문기자의 차별성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전문기자가 언론사 편집국 안에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창 부서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초년 기자 시절, 한 선배에게 힘들다고 투덜거렸더니, 그는 내게 “오래 가려면 ‘스페셜리스트’를 하고, 높이 가려면 ‘제네럴리스트’가 돼야 한다”고 했다. 특정 분야 전문기자가 되면 한 부서에서 오랫동안 평기자는 할 수 있지만 부장, 차장, 국장이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여러 부서, 특히 국회·청와대·법조 등 권력 핵심 출입처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와 같은 기관들이 대중의 삶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곳 맞다. 다만 신문을 펼치면 종합면은 언제나 정치 기사들로 도배가 돼 있다. 편집국 의사결정 구조에서 전문기자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언론사는 드물다.


모든 기자가 전문기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캐비닛’을 만들어 두라 이야기 한 것은, “지금 취재하고 공부한 것들이 훗날 반드시 써 먹을 때가 있으니 잘 기록하고 저장해두라”는 의미였다. 세상은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쳐져 있지 않다.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문화부의 일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사회 구조를 파악하고 입체적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제네럴리스트의 장점이다. 그래서 스페셜한 제네럴리스트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제너럴한 스페셜리스트도 될 수 있다. 격변의 시대에 적응하느라 언론사들이 그동안 내부 구성원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닌지 돌아봤으면 좋겠다. 어차피 다 사람이 하는 일 아닌가. 젊은 기자들이 인터뷰이가 아니라 직업 때문에 시무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하영 ROBUTER 편집장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