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0월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해상에서 서해페리호가 침몰했다. 승객 362명 가운데 292명이 사망한 대형 사고였다. 언론은 이 사고를 후진국형 인재로 진단했다. 그러나 언론의 보도 행태 또한 ‘후진적’이라고 평가받을 만했다. 당시 기자협회보는 “떼거리 저널리즘이 언론의 위신에 먹칠했다”고 비판했다.
시작은 서해페리호 선장과 일부 선원들이 사고 당일 구조된 뒤 도주했다는 오보가 나오면서부터였다. 한겨레가 10월13일 다른 선원들의 증언을 빌어 “선장이 살아있다”고 보도한 이후 여러 언론이 이들의 생존을 기정사실화했다. 보도 초점이 선원 생존 여부로 쏠리면서 은신설, 해외도피설, 목격자 증언, 통화자 증언 등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까지도 무차별적으로 기사화됐다. 검찰은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이들을 지명수배하기도 했다.
언론 보도와 달리 선장 등은 15일 주검으로 발견됐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서해페리호의 통신실에서였다. 다른 직원들의 시신도 잇따라 수습됐다. 오보를 남발하던 언론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생존설을 처음 기사화했던 한겨레는 기명기사로 보도 경위를 자세히 밝히면서 “결과적으로 기사 욕심에 취해 풍문과 억측에 덩달아 춤을 춘 꼴이 된 언론의 행태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사죄했다.
생존설 보도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세계일보는 기사 <며칠이면 드러날 사실을>을 통해 확인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한 채 헛소문을 예단하고 수사와 보도 방향을 잘못 짚은 검찰과 언론을 힐책했다. 경향신문은 “유언비어의 세태에 그것을 쉽게 믿어버리는 우리의 의식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했고, 조선일보는 사설 <조선일보의 사과>에서 “중대한 오보를 한 데 대해 반성과 함께 깊은 사과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기자협회보는 서해페리호 오보 파동이 언론계에 미칠 영향을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당시 기자협회보는 “이번 오보 사건으로 언론의 신뢰성이 손상됐고 위신도 실추했다”고 비판하면서도 “신속하고 분명한 언론의 사과와 다짐을 계기로 오보 사태의 주범인 무리한 속보 경쟁, 고질적 병폐인 냄비 기질과 떼거리즘의 구태를 벗어나리란 기대가 있다”고 전망했다.
김달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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