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윤리강령, 시대 반영의 기로에 서다

[사회 변화속도 못 따라가는 윤리강령]
언론현업단체들 강령·준칙 개정 절차 분주, 개별 언론사들도 자체 준비
기자협회 등 언론3단체, 최근 TF 꾸려 '달라진 기자윤리 이슈' 논의

2011년 10월6일 경향신문은 ‘기자 윤리강령’을 1면 전면에 내걸었다. 경향 창간 65주년을 맞아 광고 기획자 이제석씨가 제작한 특별 광고다. 광고 문안으로 쓰인 윤리강령은 절취선에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 ‘언론인 여러분들은 가위로 오려서 책상 앞에 부착해 주십시오’라는 문구가 붙었다. 이제석씨는 작품을 설명하면서 “이 구닥다리 문서가, 언론이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이전에 스스로는 과연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를 묻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사진=Freepik.com

▲사진=Freepik.com


윤리강령은 쉽게 말하면 기자의 ‘업무 매뉴얼’이다. 이씨의 제안처럼 기자들이 책상 앞에 붙여두고 늘 되새겨야 할 마음가짐이자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사회가 변화하면 언론인의 가치판단도 달라져야 하고 그 잣대인 윤리강령 또한 진화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기자협회가 1994년 제정한 뒤 2006년 한 차례 개정한 이 ‘구닥다리 문서’는 사회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개별 언론사들의 윤리강령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파른 디지털화와 함께 언론의 모든 활동이 공개되고 실시간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이전과 다른 윤리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최근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려는 언론현업단체들과 여러 언론사가 새로운 기자윤리, 취재보도 준칙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언론계의 윤리 강화는 세계적인 흐름이다. 미국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2015년(국내 출간 기준) 발표된 책 <디지털 시대의 저널리즘 윤리>는 오늘날 저널리즘이 직면한 근본적인 도전 중 하나로 ‘뉴스 생산에서 어떤 윤리를 따라야 하는가’를 꼽았다. 이 책을 엮은 미국 언론인 켈리 맥브라이드와 톰 로젠스틸은 “디지털 시대는 저널리즘이 제작되고 전달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 바탕이 되는 윤리적 의사 결정을 수정해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며 “뉴스 생산에서 윤리적 의사 결정을 이끄는 원칙이 의미를 지니려면 각 세대가 자신의 새로운 여건 속에서 이 원칙을 새롭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내 언론계에선 올해 들어 기자윤리 논의가 본격화했다. 지난해 10월 KBS의 ‘김경록 PB 인터뷰 ’를 비롯해 올해 ‘검언 유착 오보’, 채널A 기자가 ‘신라젠 사건 정관계 로비 의혹’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보인 취재윤리 문제 등은 밖으로 논란을 낳았을 뿐 아니라 기자사회에도 큰 고민을 안겼다. 최근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찬성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언론계의 문제의식을 강화한다.


오래전 윤리강령을 제정했던 언론현업단체들은 지난달부터 TF를 꾸려 달라진 기자윤리 이슈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신문협회는 신문윤리강령 개정 작업을 하고 있다. 박홍기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장은 “신문윤리강령은 1957년 제정 이래 몇 번의 개정을 거쳤지만 지금도 ‘언론 자유’를 가장 중요시하는 등 현시대와 동떨어진 내용이 있다”며 “언론의 흐름 변화에 따라 강령을 손봐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세계적으로 언론의 책무성과 투명성이 강조되는 만큼 우리도 그 트렌드를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 윤리강령 대부분은 ‘언론 자유’를 첫 번째 조항으로 내세운다. 독재 정권하에서 권력에 저항해온 역사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강령은 선언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보도윤리보다는 직업적 윤리에 초점이 맞춰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16년 발간한 연구서 <디지털 저널리즘 투명성 제고를 위한 기술적 제안>은 국내외 저널리즘 윤리 강령을 분석한 뒤 “한국은 미국에 비해 덜 체계적이며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의 성격이 약해서 실용성이 부족하다”며 “유보 조항이 많아 기자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기보다는 간부의 결정으로 남겨 두는 일이 많다”고 평가했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토론도 이뤄지고 있다. 기자협회와 편집인협회, 한국인터넷신문협회는 지난달 기자윤리제정위원회(가칭)를 꾸려 현재 기준에 맞는 새로운 윤리 헌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언론학자 2명, 변호사 1명, 세 단체 소속 인사 3명, 현직 기자 7명 등 총 13명으로 구성된 윤리위는 매주 회의를 연다.


윤리위 위원인 김민정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기존 강령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지만 수용자와의 관계, 취재과정의 윤리, 사회와 개인에 끼치는 해악성 등에 대해선 소홀하다”며 “인권, 젠더 감수성 향상 등 사회 변화를 담은 포괄적인 핵심 원칙을 뽑아내는 쪽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김 교수는 “언론계 스스로 윤리를 재정비하고 이를 준수하겠다는 선언을 통해 언론이 바람직한 방식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개별 언론사에서도 올해 윤리강령 또는 취재보도 준칙을 재정비한 사례가 많다. 한국일보는 지난 1월 편집강령 개정과 함께 취재보도 준칙을 신설했다. 한겨레도 지난 5월 13년 만에 취재보도 준칙과 범죄수사·재판 취재보도 시행 세칙 개정판을 선보였다. ‘신라젠 사건’ 이후 성찰·혁신위원회를 출범한 채널A는 실질적인 취재 가이드라인을 제작할 예정이다. 지난 8월 방송제작 가이드라인 개정안을 발표한 KBS에선 기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적용할 수 있는 취재보도 세부준칙 마련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윤지연 KBS 기자협회장은 “방송제작 전체를 아우르는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되 취재보도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민,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는 구체적인 원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컸다”며 “구성원 전수조사를 통해 무엇이 필요한지 의견을 모았고 한창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앞으로의 관건은 실행력이다. 이들이 마련한 새 규칙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할지, 실제 변화까지 이끌 수 있느냐다. 이봉현 한겨레 저널리즘책무실장은 “이번 한겨레의 준칙 개정은 실행력을 담보하는 제도적 장치(저널리즘책무실, 책무위원회 설치)를 마련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라며 “한두 언론사가 아니라 여러 곳이 함께 작업한다면 언론 전체의 신뢰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언론 3단체 윤리위의 한 위원은 “제도권 언론사뿐 아니라 언론행위를 하는 모든 이들이 공유할 수 있는 윤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달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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