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참 이상한 여행 에세이가 있다. 주인공은 부산의 ‘보통 할매’ 71세 김원희 할머니. ‘9박11일 유럽 12개국 완전정복’같은 패키지여행보다는 직접 항공권을 검색하고 캐리어를 끌 때 에너지가 솟아나는 김 할머니는 언제나 ‘자유’ 여행을 꿈꾼다. 여행 준비의 시작은 관절약과 소염제, 파스와 찜질팩 챙기기. 그리고 이어지는 할머니의 여행기는 추한 것, 부끄러운 실수는 인스타그램의 정방형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고야 마는 젊은이들의 여행기와는 사뭇 다르다.
프랑스 아비뇽에서는 자취방을 숙소로 빌려준 학생을 보고 딸 생각이 나는 바람에 사흘 내내 방 구석구석과 싱크대를 청소한다. 음료를 공짜로 주는 공간이 있다는 설명에 호텔 곳곳을 헤매며 ‘미니 바’를 찾아다니다 청소부 손에 이끌려 냉장고 안에서 바로 그 ‘미니 바’를 발견하기도 하고, 영어단어 ‘Book’에는 책 말고도 ‘예약’이라는 뜻이 있다는 걸 나이 예순에 직접 숙소를 예약하며 배우고, 무릎을 친다.
할머니의 좌충우돌 여행기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8월 중순 출간된 이 책은 곧 2쇄를 찍는다. 진정성에 솔직함을 더한 노년의 이야기에 우리사회가 귀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김 할머니가 처음은 아니다. 유튜브 구독자 130만명과 소통하는 ‘코리안 그랜마’ 박막례 할머니와 젊은 세대보다 더 감각 있는 패션 센스를 자랑하는 68세 유튜버 ‘밀라논나’, 시니어 모델 김칠두씨까지…. 최근 2~3년 사이 급부상한 ‘실버 콘텐츠’와 이에 열광하는 2030세대가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 젊은 기자들은 이 같은 트렌드를 ‘뉴트로’나 ‘힐링’ 같은 키워드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김 할머니의 여행기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또 다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말한다. 나이 들어 여행한다는 건, 몰랐던 세상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세상과 시간을 보러 가는 것이라고. 그리고 할머니는 또 말한다. 나이 들어 낯선 나라에서 좌충우돌을 겪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코로 스며드는 익숙한 집 냄새와 가족들의 체취에서 새로운 편안함을 느낀다고.
김 할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실버 콘텐츠’들을 통해 우리는 ‘늙음’의 괴로움을 겪지 않고서 공짜로 삶의 교훈을 체득하는 행운을 얻는다. ‘그토록 무료하고 짜증나고 힘든, 지금 그 시간, 지금 그 자리가 돌아보니 사실은 가장 편안한 것들이더라. 아등바등 열심히 산 시간들, 그리하여 남은 것은 짧아진 내 생의 시간뿐이더라.’
소녀와 엄마, 할머니의 시간을 거치며 산전수전을 겪은, 혼자 힘으로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한 70대 할머니의 눈에 ‘다음 생에 태어나고 싶은 곳’으로 들어온 곳은 어디일까.
프랑스 노르망디 근처의 영국령 사크 섬, 인공의 빛이 없는 곳이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이렇게 썼다. ‘밤하늘이 유난히 어둡고, 별이 유난히 반짝이는 동네. 자연의 빛을 받아들이며 우주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단순한 삶. 순한 눈을 가진 소와 친구하며 밭을 일구고,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이 밝혀주는 마을길을 따라 북클럽에 가서 낭랑하게 책 읽기를 하자.’
이서현 동아일보 오피니언팀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