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소송에 몸살 앓는 언론계

기자들 '일단 당하면 정신 하나도 없다', 신중한 기사로 피해 줄어 좋지만, 정당한 보도마저 위축 우려

기자들 "재판 준비로 취재도 못한다"

언론사, 자문변호사제 등 예방책 부심



언론계가 소송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자들은 소송 노이로제에 시달릴 지경이고, 언론사들은 소송 제기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이달 들어 서울 언론사를 상대로 제기된 큼직한 소송만 해도 7일 대명레저산업이 MBC 뉴스데스크 보도와 관련해 836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며, 3일에는 국방부가 KBS 추적60분 보도에 4억 원의 손해배상 및 6개항의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국방부는 또 지난달 29일 문화일보의 국방군사연구소 보도에 관해서도 5억 원의 손해배상을 냈다. 개인 차원에서 제기한 소소한 소송은 파악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소송을 당해본 기자들은 승패 여부를 떠나 대부분 ‘악몽’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 판결을 받은 한 기자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스트레스가 대단했다”고 밝혔다. 또 한 기자는 “일단 소송이 제기되면 회사에서 비용을 부담하더라도 해당 기자는 회사의 눈치를 보게 되고 인사 상 불이익도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소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취재 위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다섯 번이나 소송에 휘말린 한 방송 기자는 “일단 소송을 당하면 재판 준비에 시간을 다 뺏겨 정상적인 취재, 보도를 할 수 없고 소송이 마무리되더라도 후에 취재하는데 상당히 위축된다. 결국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기사를 제대로 쓰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또 한 신문사 차장은 “결국 활발한 비판 보도를 하는 기자가 명예훼손 소송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냐”면서 “요즘은 골치 아플 듯한 기사는 아예 피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동안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로 피해자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기자들이 소송을 의식하게 된 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기자들이 취재를 하면서 한 번 더 확인하고, 기사의 표현 하나, 용어 하나에 더 신경 써 억울한 시민들이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송 노이로제가 긍정적인 효과에 그치지 않고 정당한 보도조차 위축시키는 경우로 이어지는 것은 문제다. 나아가 권력 집단이 이러한 현상에 편승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행태를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한 신문사 기자는 “유명 인사들이 소송을 안전판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한번 걸어놓으면 관련 기사나 비판 기사를 쓰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입막음을한다”고 소송 악용을 지적했다.

특히 최근 사법계가 언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잇달아 승소해 사법계에 대한 감시, 비판이 위축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 신문사 차장은 “몇 해 전부터 언론이 법조계 비리를 보도하기 시작하자 언론과 법관들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졌다”면서 “최근 판례들을 보면 사법부가 ‘언론은 나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판결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소송이 일상화하면서 언론사는 소송 예방 활동에 분주하다. 조선일보는 몇 년 전부터 변호사 기사 열람제를 도입해 문제가 될 만한 기사가 있으면 담당 데스크가 ‘변호사 열람용’ 딱지를 붙여 원고를 변호사에게 보내고 변호사가 전화로 의견을 보내오면 편집국에서는 이를 대부분 수용한다. MBC 역시 자문변호사제를 통해 문제 소지가 있는 기사나 프로그램에 자문을 구하는 등 변호사 기사 열람제를 도입하지 않고 있는 언론사에서도 애매한 기사에 대해서는 변호사의 자문을 얻도록 하고 있다. 한겨레는 ‘편집부문 고문 변호사’를 위촉해 전문적으로 기사를 심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법무전담 직원을 두는 언론사도 갈수록 늘고 있다.

소송에 대한 예방 차원에서 기자 교육도 강화되고 있다. 언론재단이 실시하는 언론사 수습기자 연수에서 관련 강의는 필수며, 많은 언론사가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수습기자 연수에도 소송을 막기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동아일보는 데스크를 포함한 전 기자를 대상으로 작년에 이어 올 가을에도 외부 전문가 초빙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MBC는 자문변호사의 피소방지대책 강연을 녹취한 테이프를 기자들에게 배포하고, 최근 들어 법무 담당자가 신임 부장 및 지방 MBC 순회 강연을 하는 등 사전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KBS는 소송 결과가 나오면 판례를 사보에 싣고, 제작 가이드라인과 법제실무집을 배포했다.

그러나 특종 경쟁이 치열하고 마감시간에 쫓기기 일쑤인 언론 환경 속에서 이러한 예방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게다가 많은 언론사는 여전히 이런 조치조차 취하지 않고 있다. 특히 조건이 열악한 지방 언론사들은 대부분 방치 상태다.

소송 비용이나 판결 금액은 서울 언론사의 경우 대체로 회사가 부담한다. 중앙일보와 SBS는 아예 삼성화재보험에서 개발한 ‘멀티미디어 배상책임보험’에 가입했다. 하지만 기자들은 소송이잦아지고소송 액수도 커지면서 앞으로 회사가 어떻게 할 지 알 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소송을 막기 위해서는 기자들은 의욕이 앞서 무리한 보도를 하지 않도록 확인 취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또한 언론사는 예방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소송 제기가 권력 감시라는 정당한 언론 활동의 위축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법부가 적어도 권력 집단이나 공인에 대한 보도는 신축적으로 판단하고 융통성 있게 판결해야 한다는 게 언론계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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