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에 질문 던진 '경향·한겨레 리더십 교체'
[Cover Story] 광고 위주 매출구조, 편집권 독립 문제, 파벌·인사 갈등
두 진보 언론 사령탑 앞에 산적한 과제들
지난 10일 한겨레신문사 내부에 선거 벽보 6장이 나란히 붙었다. 각각 숫자 기호가 적힌 포스터에는 진심, 실험, 비전, 변화, 신뢰 등의 단어와 함께 여섯 명의 얼굴 사진이 실렸다. 한겨레신문 제18대 사장 선거에 출마한 이들이다.
선거철이면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벽보 형식이지만, 신문사 사장 후보들이 등장하는 선거 포스터는 아무래도 낯설다. 주요 전국 일간지·방송사 가운데 구성원들이 내 손으로 직접 사장을 뽑는 곳은 한겨레와 경향신문뿐이다. 이달 경향신문도 사장 선거를 치렀다. 대표적인 진보 언론사 두 곳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구성원 직접 선거라는 동일한 방식으로 새 리더십을 세운 것이다.
두 신문사가 사장 직선제를 시행하는 배경엔 독특한 소유구조가 있다. 한겨레는 1988년 국민주로 탄생한 신문이다. 창간 초기엔 사내외 인사 20명으로 구성된 경영진추천위원회를 통해 사장을 선출하다 1999년 직선제를 도입했다. 경향신문은 1998년 한화그룹에서 분리돼 사원주주회사로 탈바꿈한 뒤 2000년부터 사장 직선제를 해왔다.
사장 선출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의견과 사내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구조인 만큼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지난 20년간 선거 때마다 크고 작은 홍역을 치렀다. 특히 올해 경향신문에선 ‘SPC그룹 기사 삭제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이동현 사장이 중도 사임하면서 차기 사장 선거가 당초보다 1년여나 앞당겨졌다. 한겨레의 경우 양상우 사장의 3번째 임기 도전이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번 선거 결과엔 두 신문사가 처한 상황과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언론계 전반의 모습도 비친다. 광고 위주의 매출 구조와 편집권 독립 문제, 직군별 또는 파벌 갈등, 내부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인사 배치 등 언론사의 미래를 흐릿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경향신문과 한겨레 구성원들은 다른 언론사엔 없는 사장 직선제를 통해 이 같은 이슈들을 더욱 크게 표출하는 셈이다. 한겨레에선 직선제에 따른 논공행상식 인사의 부작용이 이번 사장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는 시선이 많다. 구성원 모두가 투표권자이다 보니 당선 이후 공을 따져 인사가 이뤄지고 내 표, 네 표가 나뉘어 갈등을 빚는 일이 반복돼왔다는 것이다. 더구나 개인별 능력과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언론계 업무 특성이 이런 상황을 더욱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의 한 기자는 “어떤 이는 보은 인사고 반대편 누구는 인사 피해를 봤다는 일들이 쌓이면서 조직이 갈라졌다”며 “현 사장 임기 동안 이 문제가 더 심해졌다는 인식이 선거 결과로도 드러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겨레 사장 선거는 지난 13일 치러졌다. 1차 투표 이후 진행된 결선 투표에서 김현대 선임기자가 득표율 65.85%(324표)로 양상우 현 사장(34.15%·168표)을 제치고 선출됐다. 김현대 당선자는 “선거 전후로 같은 편끼리 모이고 또 편이 아닌 사람은 배제되면서 전체 인력 가동률이 20~30%밖에 안 되는 상황”이라며 “친소 관계나 정파를 배제하고 오로지 회사의 전략적인 목표에 따라 인재를 공정하게 발탁하고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7일 경향신문 신임 사장으로 선출된 김석종 상무는 당선 소감으로 가장 먼저 ‘화합과 화해’를 언급했다. 앞서 지난해 12월 사장과 광고국장 등이 거액의 협찬금을 약속받고 SPC그룹 관련 기사를 삭제토록 지시한 사건을 두고 편집국과 비편집국, 편집국 내부에서도 인식 차이를 보이며 갈등이 불거졌다. 이 상황 역시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 현 사장 체제에서 상무로 일해 온 김석종 당선인은 편집국장 출신인 박래용 논설위원에 단 17표 앞섰다. 득표율은 각각 51.77%(249표), 48.23%(232표)였다.
김석종 당선인은 경영계획서와 출사표를 통해 “이 갈등의 원인은 소통 부재라고 생각한다. 유례없이 격렬한 논쟁으로 깊은 상처를 주고받았다”면서 “이번 사장 선거는 편집국 기자직과 경영·관리·제작·업무직 사이에 깊어진 골과 틈을 메우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위기를 새로운 출발의 모티브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김석종 당선인은 오는 27일, 김현대 당선인은 다음달 21일 열릴 주주총회에서 추인받아 신임 사장 임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선거 전후 과정에서 떠오른 내부 갈등을 수습하고 구성원들의 기대감을 충족하는 것은 이제 두 사장의 몫이다.
경향신문의 한 기자는 “완벽한 제도는 없지 않나. 사장 직선제 이후의 혼란스러움은 민주주의의 불편함 정도라고 본다”며 “정상적으로 선거를 치렀고 결과도 나왔으니 앞으로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해내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사장 선출·선임제도 개선 움직임
한겨레에선 이번 사장 선거를 계기로 직선 방식을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직선제는 1999년 도입 당시 ‘한겨레 사내 민주주의 가치를 체현해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흐르며 내부 분열을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길윤형 전국언론노조 한겨레지부장은 “직선제는 리더십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여러 차례 시행하다 보면 파벌화 경향이 강해진다”며 “그로 인해 조직이 받아야 하는 상처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반드시 패자가 나오는 선거판에 내부 인사들이 뛰어들어 경쟁을 벌이고, 선거 이후에도 서로 상처를 안은 채 화합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선거에 앞서 노조는 ‘직선제 이대로 좋은가’라는 의제를 던졌다. 언론노조 한겨레지부는 노보를 통해 “직선제 여파로 현재 회사는 사분오열돼 있다. 지난 3년간 도를 넘는 보복·배제·분열이 이어졌다”며 “한동안 유지해 온 사장 선출제를 전체 구성원이 재고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한다. 역사적 소임을 다한 직선제를 대체할 대안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자”고 했다.
사장 후보자들은 각각 개선방안을 제시하거나 새 제도를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선거에 출마했던 김종구 한겨레 편집인은 단임제와 함께 ‘CEO 승계위원회’라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다. 절차는 먼저 경영진 교체 시기가 다가오면 전직 대표이사, 외부 경영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승계위를 꾸린다. 여기서 차기 사장 희망자들의 능력과 비전 등을 심사해 후보자 1명을 선출한다. 후보 1인이 단독으로 입후보하면 기존 선거는 동의 투표 형식이 되고, 또 다른 후보가 출마할 경우 직선으로 치러지는 방식이다.
김현대 한겨레 사장 당선자 역시 직선제 개선 의지를 피력했다. 내부 의견 수렴을 거쳐 취임 후 1년 반 안에 사장 선출 개선안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김현대 당선자는 “선거제 폐해가 누적될 대로 누적됐다. 지금 식의 선거제는 마지막”이라며 “기자 출신 중에 경영 물 조금 먹은 사람들끼리 고만고만한 CEO 경쟁을 벌인다. 바깥으로도 CEO 문호를 활짝 열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공영방송 등 정부 지분이 투입된 언론사에서도 사장 선임 방식을 새롭게 바꿨거나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절차를 외부에 공개하거나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방향이다. 지난 2018년 KBS 사장 선임 과정에 140여명의 시민자문단이 참여해 업계의 주목받았다. 이들은 후보자 정책발표회에 참석해 직접 질문을 던지며 답변을 이끌어냈다. KBS 이사회는 시민자문단의 평가(40%)와 후보자 면접 점수(60%)를 합산해 신임 사장을 선임했다.
MBC는 이달 진행된 새 사장 선임 과정에 시민평가단을 대상으로 한 후보자 정책발표회를 처음 도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난 22일 개최 예정이던 정책발표회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여파로 취소됐다. 이에 따라 시민평가단이 사장 후보자 3인 가운데 2명을 추리는 절차는 생략됐고 후보자별 정책발표 생중계만 진행됐다.
연합뉴스 노조는 연합뉴스 사장 추천 권한이 있는 뉴스통신진흥회에 사장추천위원회 구성과 관련한 진흥회 정관 개정을 촉구했다. 언론노조 연합뉴스지부는 지난 18일 성명을 내어 “일반 시민 70명과 사원대표 40명으로 구성한 참관인단이 참여해 2018년 최초로 실시했던 ‘사장 후보 정책설명회’ 절차를 명문화해야 한다”며 “그래야 사장 선임 시기만 되면 끊임없이 정치권을 바라보는 구조를 끊을 수 있고 연합뉴스에 대한 정치적인 개입을 차단할 수 있다”고 했다.
홍제성 언론노조 연합뉴스지부장은 “차기 사장 선임까지 1년이 남았지만 후보군 윤곽이 드러나기 전에 룰을 바꿔야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정관 개정을 요구한 배경을 전했다.
사장 선임 때마다 정부의 낙하산 논란이 불거졌던 서울신문에서도 연내 선임제도 개선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9월 기준 서울신문의 대주주는 기재부(지분율 33.86%), 우리사주조합(32.22%), 호반건설(21.55%), KBS(8.98%) 등이다. 박록삼 서울신문 우리사주조합장은 “내년 초 새 사장 선임을 앞둔 올해가 선임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적기”라며 “내부 의견을 모으는 것뿐 아니라 정부(대주주)와의 협의도 중요하다. 2001년 우리사주조합 출범 취지였던 민주성, 자율성, 공공성 등을 사장추천위원회에 담아낼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두 당선자 공약 들여다보니
“반듯한 언론 번듯한 경영, 미래는 지금 시작됩니다.”(김석종)
“기분 좋은 변화 2020.”(김현대)
경향신문과 한겨레 사장 후보자들이 각각 내놓은 경영계획서·정책공보물에는 두 회사를 넘어 신문업계가 처한 현실과 과제, 콘텐츠 강화 전략, 수익 사업, 나아가야 할 방향 등 언론사 경영진으로서의 깊은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더욱이 직선제하에서 구성원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기에 후보들은 피부로 와 닿는 공약과 구체적인 이행 방안을 제시해야 했다.
먼저 김석종 경향신문 사장 당선인과 김현대 한겨레 사장 당선인이 공통적으로 제시한 ‘편집인의 역할 재분담’이 눈길을 끈다. 경향신문에선 그동안 사장이 편집인을 겸해왔다. 이 때문에 편집인과 경영자의 업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지적과 사장의 언급이 편집권에 대한 간섭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지난 ‘SPC그룹 기사 삭제 사건’도 이런 환경에서 불거졌다. 김석종 당선인은 별도의 편집인을 임명해 편집권 독립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경영의 논리가 경향의 가치보다 앞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편집인을 따로 두고 있는 한겨레에선 편집국장이 취재·보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편집인에게 디지털 혁신 등의 전략적 업무를 맡기겠다는 공약이 나왔다. 김현대 당선인은 “오래전부터 신문사 편집국장은 과부하 상태였다”며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미디어 격변에 대응한 혁신이 긴급한 시대에 (편집국장) 한 명이 디지털 콘텐츠와 종이신문을 모두 잘 만들면서 조직과 콘텐츠 혁신까지 끌어가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회사 전체의 방향성 설정과 디지털 전략, 신사업 마련, 수익구조 개선 등은 공약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를 비롯한 종이신문의 위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 1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표한 <2019 언론수용자 조사>에서 ‘지난 한 주 동안 종이신문을 읽었다’는 응답자는 12.3%에 불과했다. 하루 평균 이용 시간은 4.2분에 그쳤고 구독률은 6.4%로 집계됐다. 모두 역대 최저치다. 두 신문사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찌감치 디지털에 뛰어든 곳으로 꼽히지만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 김석종 당선인은 “디지털 전략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아프게 짚고 냉정하게 돌아볼 것도 큰 분야”라며 “고객 데이터 분석이나 콘텐츠 유료화 등의 이야기는 많았지만 결국 제대로 된 실행이나 성공은 없었다. 이는 다른 언론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김석종 당선인은 △데이터 분석 능력 △유저의 니즈를 파악하는 서비스 마인드 △그것을 실제 플랫폼으로 만들어내는 기술력 △많은 유저를 확보하는 마케팅 능력 등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디지털 콘텐츠 생산부서와는 별개로 디지털 전략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컨트롤 타워를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독자 참여 프로그램 개발, 후원모델 실험, 버티컬 콘텐츠 등으로 독자 데이터를 확보하자고 제안했다.
김현대 당선인은 ‘디지털 후원·구독 모델 구축’을 핵심 비전으로 내세웠다. 기부 성격의 후원 멤버십 회원 최대 10만명을 목표로 하고 동시에 경제, 시니어, 2030여성 등 특화 콘텐츠 채널에선 구매 방식의 유료화를 시도하겠다고 했다. 편집인 산하에 콘텐츠전략팀을 신설해 이 업무를 맡도록 하고 독자 데이터 확보·분석 시스템을 새로 개발하겠다고 덧붙였다.
김현대 당선인은 “디지털에서 지속가능한 수익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느 언론사나 절체절명의 과제”라며 “손쉽게 성공할 자신이 있어서 후원·구독 모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 길이 아니면 낭떠러지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광고에 의존하는 우리의 비즈니스모델이 다양성과 건강성을 확보하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김달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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