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편집팀 기자들이 편집국장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사퇴 촉구 성명을 냈다. 언론사 가운데 상대적으로 내부 비판이 활발한 한겨레에서도 편집부서 구성원들의 성명은 이례적이다.
이들은 지난 3일 '박용현 편집국장의 독단적 편집권을 거부한다'는 제목의 성명에서 "지난해 '조국 사태'를 거치며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국장의) 약속은 말뿐이었다"며 "(편집팀 기자들은) 뉴스 가치 판단이 다를 땐 충분한 설명을 듣고자 했고, 제목을 바꿔야 할 땐 합당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편집회의 뒤 돌아온 (국장의) 대답은 때때로 합리적 설득이 아닌 일방적 지시였다"고 토로했다.
이날 성명 발표의 직접적인 계기는 한겨레가 새해 기획으로 선보인 1일자 <노동자의 밥상> 보도다. 이에 대해 편집팀 기자들은 "1주일 전부터 지면을 잡은 편집자가 오랜 시간 공들여 고민한 결과물이 국장의 말 한 마디에 무너져 내렸다"며 "편집팀 간부들이 기획에 맞춘 편집 의도를 충분히 설명했음에도 제목과 레이아웃에 대한 편집팀 의견은 묵살된 채 강행됐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편집에디터가 국장의 지시에 항의하며 보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편집팀 기자들은 "'노동자의 밥상' 기획은 국장의 독선적 리더십이 그대로 드러난 단면"이라며 "기획면의 경우 사전에 협의하고 조율해서 제작하기로 한 국장의 방침을 국장 스스로 무너뜨렸다. 이게 박 국장식 소통 강화라면 우리는 거부한다"고 했다.
기자들은 같은 날 2면에 실린 '조국 불구속 기소' 관련 보도의 제목에도 문제제기했다. 해당 기사는 '검찰이 조국 전 장관에 대해 과도한 수사를 했다', '언론에서 제기한 의혹들에 대한 조 전 장관의 해명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등 2가지 내용을 모두 담았는데, 국장의 지시로 검찰만 비판하는 쪽으로 제목(검, 유례없는 넉달 '먼지털기 수사'/"태산명동 서일필" "불구속 아쉬워")이 달렸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기자들은 "편집회의 뒤 국장이 제목을 불러주며 주문했고, 편집자는 기사를 미처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주문대로 제목을 달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며 "야근 편집자가 기사에 충실하게 '검, 유례없는 넉달 과도한 수사/조국 거짓 해명 얽혀 여론 양극화'라고 뽑은 제목은 국장의 강압적인 지시에 의해 무참히 깨졌다"고 비판했다.
기자들은 "우리는 소신과 원칙에 따라 기사에 충실한 제목을 뽑고 싶다. 그 전제는 신문을 만드는 편집의 원칙이 국장 개인의 협량한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 데 있다"며 "구성원과의 합의된 절차를 짓밟고 독단적 판단을 강요하는 국장의 편집권 행사에 더 이상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들은 "국장이 편집국장 직무를 스스로 내려놓기를 정중히 요구한다. 무너질대로 무너진 리더십으론 한국 사회의 뜨거운 이슈에 적극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서 박 국장의 사과와 사퇴, 지면제작 관련 비상체제 가동 등을 요구했다.
편집팀 기자들의 성명과 관련해 한겨레신문 노동조합은 "편집국장이 편집부 절대 다수 구성원으로부터 ‘비토’당한 이 사태를 매우 고통스럽게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한겨레 노조는 지난 3일 입장문에서 "편집부의 신뢰를 잃은 국장이 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편집국장은 이제 그만 결단을 내리시는 게 본인 스스로와 조직 전체를 위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겨레 관계자는 "조만간 국장과 편집팀 기자들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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