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만… 경향 기자로서 떳떳하고 싶었다"

'SPC그룹 기사 삭제' 경향, 사장·편집국장·광고국장 초유의 동반사퇴

경향신문이 사장·편집국장·광고국장의 동반 사임을 초래한 ‘기사 삭제 사태’ 여파로 진통을 겪고 있다. 진상조사위원회 구성부터 새 사장 선임, 재발방지책 마련 등 사태 수습을 놓고 구성원 사이에 이견을 보이면서 2일 노조 총회가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번 사안이 외부로 알려진 건 지난달 22일이다. 이날 한국기자협회 경향신문지회는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린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2019년 12월13일자 경향신문 1·22면에 게재 예정이었던 A기업에 대한 기사가 해당 기업의 요청을 받고 제작과정에서 삭제됐다”며 “이번 일을 외부로 솔직하게 공개하고 사과드리는 것이 독자 여러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성명에 언급된 기사는 <중 “파리바게트 상표 등록 무효: 한국 기업들 ‘2차 한한령’ 공포> 등 2꼭지다. 중국 법원이 SPC그룹의 프랜차이즈 ‘파리바게트’의 상표 등록을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놓아 중국에서 300여개 점포를 운영 중인 파리바게트가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고, 유통업계에선 ‘중국 리스크’ 우려가 나온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들 기사는 지면편집까지 마쳤지만 다음날(12월13일자) 신문에선 볼 수 없었다. 기사 삭제를 조건으로 거액의 협찬금을 지급하겠다는 SPC측의 제안을 경향이 받아들여서다. 경향지회는 성명에서 “사장과 광고국장은 (SPC에 협찬금의) 구체적 액수를 언급했다. 사장은 기사를 쓴 기자와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동의를 구했다”며 “편집국장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해당 기사는 지면에서 사라졌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이튿날 사직서를 냈다.



이번 사안의 사실관계를 파악한 경향지회는 지난달 19일 기자총회를 열었다. 이날 기자들은 사장의 직무 중단과 차기 사장 선출 절차 착수, 편집국장·광고국장의 직무 중단과 징계 검토, 진상조사위 구성과 재발방지책 마련 등을 결의했다. 사태 발생에 책임이 있는 사장과 편집국장, 광고국장은 사의를 밝혔다.


경향지회가 총회 결의안을 바탕으로 발표한 성명은 언론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기사와 광고·협찬금을 맞바꾸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언론계 현실에서 경향 기자들의 공개적인 문제제기는 타사 기자들에게도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주요 경제지 소속인 한 기자는 “광고나 협찬금 때문에 기사를 내리는 건 빈번하다”며 “여러 언론사에선 당연시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는 경향신문 기자들의 결기가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의 허리연차 기자는 “타사 기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언론사 수익구조상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말도 나오지만, 경향 기자들에게 이번 사안은 그동안 공유해온 가치의 마지노선을 넘어섰다”며 “선배들도, 우리도, 후배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늘 방을 붙이고 문제제기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반면 경향 내부에선 기자들의 성명 발표 시점과 이를 기사화해 외부로 공개하는 과정이 성급하게 이뤄졌다는 목소리도 있다. 편집국만이 아니라 비편집국도 직접 연관된 데다 아직 진상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들의 성명서 내용이 마치 경향 전체의 입장인 것처럼 비춰졌다는 시각이다. 경향신문의 한 구성원은 “편집국과 광고국이 연계된 문제인데 기자협회가 전체 구성원의 논의나 합의 없이 성명을 급하게 냈다는 불만도 나온다”며 “편집국과 광고국, 각 국 안에서도 온도 차가 있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다른 언론사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경향지회와 사원주주회, 노조 대표는 지난달 24일 3자 회의를 열어 사태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3인은 △빠른 시일 내에 사과와 경위 설명, 재발 방지책 등과 함께 전체 구성원 뜻을 담은 사고 게재 △사건 경위 파악과 재발방지책을 마련할 진상조사위원회 구성 △빠른 시일 내 사장 선거 실시 등을 합의했다. 단 이동현 사장이 제안한 ‘빠른 사장선거와 차기 사장 선임 시까지 인사권·편집인 권한 행사 중단을 전제로 한 사장직 유지’를 존중하기로 했다.


이날부터 사원주주회는 새로운 사장을 뽑기 위한 선거관리위원회 체제로 전환했다. 선관위는 수차례 회의를 열어 지난달 30일 사장 선거 일정을 공고했다. 이달 6일 대표이사 공모 사고 게재를 시작으로 다음달 5일 투표, 7일께 주주총회에서 차기 사장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각 단체 대표자 3인은 지난달 31일에도 입장문을 내고 편집국과 광고국에 진상조사위의 조속한 구성과 참여를 당부했다. 이어 이들은 “조사위 활동 결과는 경향신문이 현 사태 해결에 얼마나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움직여 왔는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기회”라며 “이처럼 중차대한 사안이 보다 내실 있게 논의되고 결론을 맺기 위해 회사 측이 조사위에 공식적으로 참가해 머리를 맞대줄 것을 요청드린다”고 했다.


진상조사위 구성, 후임 사장 선출 등 사태 수습책은 2일 예정된 노조 조합원 총회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한 기자는 “편집국과 비편집국이 기본적으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정서가 다르고 편집국 내부도 다른 생각을 가진 기자들이 있다”면서 “2일 노조 총회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기자는 “사태를 온전히 수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면서도 “아무리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다지만 기사 삭제건은 우리를 언론사로서, 기자로서 떳떳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통 언론의 생존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대안을 찾고 경향신문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달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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