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무역전쟁에 볼모로 잡힌 경제

[스페셜리스트 | 금융]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부장·신문방송학 박사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부장.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부장.

‘기업 2만2828개 부도(1998년 기준), 실업자 157만명(1999년), 자살자 8569명(1998년)...’ 국가를 부도 상태로 몰아넣은 비극 ‘IMF 환란’. 그 배경에 외교 문제가 있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O-157 병원균이 검출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놓고 클린턴 대통령과 정면충돌했다. 한·일 간 마찰도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발언하면서다. 외환보유고 고갈 직전 한국의 지원 요청에 미국 월가와 일본 대장성이 등을 돌린 배후엔 이런 외교적 갈등 상황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 발발한 한국과 일본 간 ‘무역 전쟁’도 그렇다. 일본 정부는 “양국 간 신뢰 관계가 현저하게 훼손됐다”고 반도체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의 이유를 밝혔다. 보복 차원의 조치임을 분명히 한 대목이다.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이후 일본이 한국에 해결 방안을 요구했으나 반응이 없자 대응에 나선 것이다. 이에 홍남기 부총리는 “상응하는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본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출 규제나 경제조치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탈냉전 이후 한·일간 갈등과 대립을 설명하는 주요 변수는 과거사와 영토 문제였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동북아 외교전략,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양국 전략 간 간극이 두드러지면서 역사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갈등 요인으로 대두됐다. 한반도 비핵화와 대북 제재 완화, 동북아 평화번영을 주장하는 한국에 비해 일본은 대북 압박과 대중견제, 미일 공동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세우고 있어서다.


사상 초유의 한·일 간 무역 전쟁의 화근은 위안부 문제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두 나라의 속셈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아베 총리의 보복 조치는 어느 때보다 중요한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보수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선거 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문재인 정부도 2015년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란 단서를 단 위안부 합의를 뒤집어 갈등을 촉발했다.


두 나라가 위안부 문제를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초유의 무역 전쟁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았다. 70여 년 전의 위안부 문제가 정치적으로 재단되면서 경제 충돌로 돌아온 것이다. 원만하게 타결되지 않으면 한국 산업이 IMF 사태에 버금가는 재앙을 맞게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경제가 정쟁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규제 개혁 등 많은 경제 현안들이 정치적 투쟁과 협상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경제는 경제 논리로 풀고, 정치는 정치 공학으로 풀어야 한다. 경제 현안에 정치적 셈법이 개입할 경우 한·일 무역전쟁처럼 후대에 커다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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