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사회에서 잊힌 사람인데… 저 때문에 먼 데까지 발걸음 하셨네요.” 제주 서귀포에서 만난 김영규 영어촌교회 목사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20년간 연합뉴스, YTN 기자로 살았던 그는 캐나다로 이민 갔다 돌아와 5년 전 제주에 터를 잡았다. 여기서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신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기자선후배 가운데 그의 독특한 근황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김 목사는 “친한 후배 몇 명과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라고 했다. “여기저기 연락하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제주가 아니라 서울에 살았을 거예요. 시골 교회에서 조용히 묻혀 사는 지금이 좋습니다.”
그는 1983년 연합뉴스(당시 연합통신)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YTN 창립준비 요원으로 선발되면서 뉴스전문채널로 무대를 옮겼다. YTN에서 스포츠, 사회, 편성, 문화부 등의 책임자로 일하다 2001년 캐나다로 연수를 떠났다. 겉으론 1년짜리 연수였지만 이미 퇴사를 마음에 두고 내린 결정이었다.
“YTN 창사 초기엔 인력이 많이 부족했어요. 24시간 뉴스채널에서 데스크를 맡다 보니 일주일 내내 새벽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날이 많았죠. 그때 저희 아이가 초등학생이었는데 늘 자는 모습만 보게 되더라고요. ‘산다는 게 뭘까’ 근본적인 회의가 들더군요. 이렇게 살다가 국장이 되고 중역이 된다? 인생에 큰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캐나다행을 택한 겁니다.”
예정했던 1년이 지났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메일로 사표를 보내고 캐나다에 눌러 앉았다. 광활한 자연 속에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놀고 또 놀았다. ‘20년이나 일에 헌신했으니 놀아도 된다, 그럴 자격 충분하다’고 되뇌며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꾼 꿈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꿈에서 ‘네 신발을 벗으라’는 음성이 들렸어요. 너무나 생생해 화들짝 깼습니다. 성경을 뒤적여보니 출애굽기에 나오는 내용이더라고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인데 제게도 들리다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그는 스무살이 되던 해 부활절 새벽기도를 다녀오던 어머니를 사고로 잃었다. 누구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어머니가 다른 이를 구하려다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다시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스스로를 “무늬만 크리스천”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계기로 신학 공부에 뛰어들었다. 캐나다와 미국의 대학교에서 기독교 세계관, 성경 신학을 전공해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10년 넘게 한국을 떠나있던 그는 잠시 방문한 제주에 반해 캐나다 살림을 정리했다. 5년 전 제주에 정착해 총회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목사가 됐다. 기자를 그만둘 땐 예상치 못한 길이었다.
기자와 목사. 전혀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 사이에 서 있는 듯하다. 김 목사가 자신의 칼럼을 다듬어 지난 1월 펴낸 책 <서울, 밴쿠버 그리고 제주, 중심과 경계에서 본 대한민국>을 보면 ‘기자다운 목회자’의 시각이 두드러진다. 그의 표현대로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이라는 그릇으로 포장하는’ 목사들을 비롯해 한국교회를 둘러싼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할 뿐 아니라 난민, 미투 운동 등 사회 이슈도 폭 넓게 다뤘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칼 바르트가 ‘한 손에 성경, 다른 손엔 신문’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깊이 공감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매몰되다 보면 신앙과 삶의 조화를 이루지 못해요. 신문·방송으로 세상일을 들여다보면서 ‘하나님은 어떻게 판단하실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게 곧 제 설교 내용이고요. 기자 경험 덕분에 목사로서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는 게 더 많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신학을 공부한 뒤부터 그의 삶은 이끌리듯 흘러왔다. 제주에 온 것, 목사가 된 것, 강단에 선 것, 얼마 전 작은 교회를 세운 것 모두 그 자신이 바라거나 의도하지 않은 일이다. 앞으로도 거창한 계획 없이, 상황이 주어지는 대로 살아갈 생각이다.
“설교하고 강의하고 기독교신문에 칼럼을 쓰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재밌어요. 예전의 저처럼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기자들이 꽤 있을 겁니다. 그분들에게 저의 이야기가 작은 동기라도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네요.”
김달아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