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때 30대 재벌 가운데 절반이 문을 닫으며 이른바 ‘대마불사 신화’가 무너졌다. 재벌의 무리한 외부 빚에 의존한 차입경영, 핵심분야가 아니어도 돈만 되면 무조건 뛰어드는 문어발식 경영, 능력에 대한 검증없이 경영권을 승계한 재벌 2세의 문제점이 한꺼번에 곪아 터졌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에도 한국 기업의 주가가 외국 기업에 비해 저평가 되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재벌 총수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기만 하고 책임은 지지 않은 채 ‘황제경영’을 하는 이른바 ‘오너 리스크’와 후진적 기업지배구조 때문이었다. 조양호·박삼구 사태는 총수가 기업가치와 주주이익을 훼손하고, 경영에 실패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을 새삼 일깨워줬다.
조 회장 일가는 2014년 말 이후 장녀인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사건을 시작으로 둘째딸인 조현민 전 전무의 물컵 갑질, 부인의 폭행·폭언 등 갑질사태가 꼬리를 물었다. 뒤이어 배임·횡령·밀수 등 각종 불법행위가 드러나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도 조 회장은 “(우리가) 잘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심하게 당하고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다가, 재벌총수로는 처음으로 주주들에 의해 이사회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맞았다.
박 회장의 퇴진은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회계법인의 한정의견 감사보고서 제출이 발단이 됐다. 하지만 박 회장은 이미 10년 전에 물러났어야 했다. 그의 주도로 금호는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인수하는데 10조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가 위기를 자초했다. 박 회장은 2009년 책임지고 물러났지만 1년도 안돼 복귀했다. 하지만 그룹 정상화보다 재건에 매달리다가 화를 자초했다. 아시아나항공이 이 과정에서 계열사 지원에 동원되면서 함께 골병이 들었다. 결국 비극의 원인은 황제 자리를 되찾으려는 박 회장의 욕심이었다.
조양호·박삼구 사태는 황제경영 신화의 종식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대한항공과 금호그룹은 잃어버린 국민과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기업지배구조와 재무구조 개선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 황제경영의 폐해는 비단 두 회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재벌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것 같은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의 비등기이사로서 계속 경영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가 비난이 쏟아졌다. 일부 보수언론은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은 외면한 채 정부의 반기업적 정책으로 기업들이 수난을 겪는다며 여론을 호도한다. 이런 상태라면 제2, 제3의 조양호와 박삼구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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