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반 방북취재 ‘절대 불허’
90년대 중반 언론단체 교류 추진
90년대 후반 방북 러시, 단발성 그쳐
2000년 남북 공동합의문 발표
분단 이후 남북의 언론인들은 간헐적으로 이뤄진 남북회담 때 공동기자단으로 평양 또는 서울을 방문해 제한된 공간에서 회담을 취재하며 접촉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언론사 차원의 방북 취재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89년에는 한겨레가 북한취재를 계획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영희 당시 논설고문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언론사의 단독 취재는 94년 9월 정연주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처음 이뤄졌다.
남북언론교류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부터다.
94년 기자협회는 남북기자교류사업을 본격 추진하기로 하고 ‘남북언론의 상호비방중지 촉구’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조선기자동맹 측에 남북언론교류사업을 제안했다. 기자협회, 언론노련, PD연합회 등 언론 3단체도 95년 8월 조선기자동맹과 중앙방송위원회 측에 ‘남북언론인회담’을 제의한데 이어 ‘남북화해 협력을 위한 보도제작준칙’을 발표했다. 이들 단체의 움직임은 당시로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언론인들 스스로 남북언론교류를 추진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97년과 98년에는 언론사들의 방북 러시가 이어졌다. 97년 중앙일보가 처음 유홍준 교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를 연재하며 북한을 방문하자 MBC, 경향신문, 동아일보, 세계일보, 한겨레 등이 잇따라 방북했다. 그러나 당시의 방북은 지속적인 언론교류나 본격적인 방북취재라기 보다는 언론사간의 과당경쟁으로 인한 단발성 이벤트로 그쳤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99년 서해교전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단절됐던 남북언론교류가 다시 활발해진 것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어진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이었다.
2000년 8월 5일부터 12일까지 이뤄진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은 남북언론교류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언론사 사장단은 △대결을 피하며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저해하는 비방 중상 중지 △남과 북의 언론기관 접촉 창구 단일화(남측은 신문협회와 방송협회 등 주요 언론단체 대표가 참여하는 남북언론교류협력위원회, 북측은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회)△북측 언론기관 대표단의 서울답방 등 5개항으로 이뤄진 공동합의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같은 합의사항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남북 상황이 경색될 때마다 언론은 화해보다는 대결의 관점에서 보도했으며, 북측 언론기관 대표단의 서울 답방도 이뤄지지 않았다. 교류협력위 역시 조선기자동맹 측에 서울 답방 초청장을 보내고 실무회담을 제의한 것을 제외하고는 합의문 이행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기대를 모았던 남북신문교류 역시 북측의 거부로 며칠만에 중단되는 등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박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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