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어느 학자의 글에 관한 에세이를 펴들었다. 유대 신비주의자들에게 전해져온 우화 한 토막이 적혀 있다. 현자는 힘든 일이 생기면 숲으로 들어가 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다. 원하는 것이 이뤄졌다. 시간이 흘러,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숲을 찾아가 “불을 어떻게 피워야 하는지 모르지만 기도는 알고 있다”며 기도했고 원하는 것이 이뤄졌다. 그 후대 사람은 숲으로 가서 “불도 피울 줄 모르고 기도도 어떻게 드리는지 모르지만 이 장소만큼은 안다”고 했고, 바라는 것이 이뤄졌다. 세대가 바뀌고 또 바뀌어, 한 랍비는 의자에 앉아 “불을 피울 줄도, 기도를 드릴 줄도, 숲속의 장소도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글로 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글은 이런 것이라고, 신비의 근원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진 인류일지언정 글로써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글의 힘은 계속 유지될까? 뉴미디어를 소비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잘 쓰인 텍스트에 충성심을 보인다. 하지만 잘 쓰인 글을 만들어내는 데에 언론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잘 다듬어진 글은 포말처럼 잠시 눈에 띄었다가 사라지고 ‘단독’과 ‘속보’를 남발하는 싸구려 글들의 바다로 가라앉는다.
신문은 교육 문제를 고발하면서 왜 ‘SKY캐슬’ 같은 걸 만들어내지 못했을까. 현실을 전하는 우리의 기법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현실을 보는 눈이 좁고 글에 대한 고민이 얕았던 건 아닐까.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고 초년 시절 선배들에게 많이 들었지만 이제는 기자들 자체가 뉴스거리다. 기자들의 무례, 기자들이 친 사고, 기자들의 무지함이 기사가 돼 떠돈다.
글은 인류의 불, 신비와 역사와 전통을 전하는 수단이자 그것의 대체물이라고 학자는 말한다. 한데 나의 고민은 경박하기만 하다. 팔순을 바라보는 아버지조차 저녁 밥상 앞에서 “이제는 신문도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글의 무게와 새로이 받아들여야 할 감수성 사이에서 글은, 언론은 어디로 가야할까. 이조차도 요즘 트렌드에 맞지 않는, 구닥다리 같은 생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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