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듯 지나간 이 장면이 ‘딸’인 나에게만 인상적이었던 걸까. 영화를 함께 본 남편은 그 장면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 아마 남성인 그는 생의 많은 시간을 긍정 속에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많은 딸들은 다른 경험을 한다. 강화길의 소설 <다른 사람>(한겨레출판 펴냄) 속 ‘여자애들’처럼. “해도 되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배운 여자애들. 된다는 말보다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란 여자애들(59쪽).”
인도 여성 레슬링 최초로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당갈>은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의 공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영화다. 주로 여성 관객의 입소문에 힘입어 상영관을 늘려나갔다. <당갈>을 먼저 본 관객들 일부는 아예 극장을 대관해 ‘응원 상영’을 열기도 했다. 알음알음 개봉 한 달 만에 10만 관객을 만났다. 천만관객 시대에 10만 관객은 조금 우스운 숫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갈>은 도무지 영화를 볼 수 없는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상영되던 영화다.
‘발리우드’가 전 세계에서 인기라지만 인도영화는 한국에서 아직까지 낯설다. 러닝타임도 160분에 달한다. 10만 관객은 이런 장벽을 뛰어넘은 놀라운 성취다.
물론 <당갈>은 ‘완벽한 영화’가 아니다(그런 영화는 있을 수 없겠지만). 이를테면 아버지는 레슬링 국가대표 금메달리스트라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자식을 생각한다. 이 영화는 아무리 좋게 봐준다고 해도 아버지라는 ‘절대자’를 위반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영화가 지킨 ‘선’에 좀 더 주목하고 싶다. 영화를 보면서 몇 번쯤 조마조마한 순간이 있었다. 아버지가 딸을 체벌하지는 않을까, 남성 선수들이 여성선수인 딸을 성희롱·성추행하지는 않을까…. 걱정과 달리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갈>은 그런 ‘역경’ 없이도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금메달 문턱에서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아버지는 이전과 달리 필승 전략 대신 당부를 전한다. “너는 여자를 하찮게 보는 모든 사람들과 싸우는 거야. 너의 승리는 너만의 것이 아니다. 네가 진다면 수많은 인도 여자아이들이 지는 거다.” 딸은 결국 아버지 없이도 이긴다. 관객은 이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알면서도 뭉클하다. 그건 딸의 승리가 수많은 인도 여자아이들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줄 거라는 걸, 우리가 직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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