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기존 질서가 붕괴하면서 기존 상식과 규범도 무너지고, 사회적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특히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엘리트 집단은 새로운 상식과 규범을 수용할 것인지를 놓고 사활을 건 시험대에 올라설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기존 엘리트, 특히 북한 문제나 외교 문제를 다루는 관료나, 학자, 언론인의 생존 지침은 무엇인가? 우선적으로 북한 문제와 관련해 치명적인 오류로 드러난 몇 가지 명제나 믿음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에 따르면 최근 김정은 위원장이 보여주는 획기적인 행보는 국제 사회를 기만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제는 김 위원장도 일정한 조건이 되면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하는 시기가 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월 취임 이후 북한에 대해 최대의 압박 정책을 펴고 있다는 가정도 수정 대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 그동안 외형적으로 북한을 압박하면서 동시에 북한과 대화하는 시나리오도 별도로 추진해 왔음이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5월 렉스 틸러슨 당시 미 국무장관이 미국은 북한 체제 붕괴를 원하지 않고, 체제 전복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한 장면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김 위원장이 말하는 군사 위협 해소나 체제 안전 보장 요구 사항에 구체적으로 호응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믿음도 오래 전에 오류로 판명났지만, 기존 엘리트 가운데 여전히 북한 붕괴론을 선호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제는 북한이 붕괴하지 않는 시나리오도 염두에 두면서 북한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는 등의 주장은 예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소수설로 무시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존 엘리트들이 기존 입장을 바꾸기보다 저항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맹목적인 저항은 쓰나미가 오는 길목에 버티고 서서, 맨주먹으로 쓰나미를 격퇴하겠다고 외치는 돈키호테의 무모함과 다르지 않다. 옛말에 군자는 잘못을 인식하면 표변(豹變)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한반도 대격변 시대에 생존 지침으로 더 이상 적절한 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왕선택 YTN 통일외교 전문기자· 북한학 박사의 전체기사 보기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