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씨는 용산참사 이후 보도사진을 그만뒀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현장에서 본 것과 언론에서 참사가 다뤄지는 양상이 달랐다. 너무 달랐다. 참사 이후 몇날 며칠 남일당 주변을 서성였다. 오라는 사람도 붙잡는 사람도 없는 장소를 혼자 뱅글뱅글 돌면서 기형도의 시 <조치원>을 떠올렸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라는 문장을 몇 번이고 외며 생각했다. 이 도시가 가르친 분노를 잊지 말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는 되지 말자고. 그해 시월 나는 기자가 됐다. 2009년 용산 참사는 이처럼 누군가‘들’의 삶의 지문을 바꿔놓았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도 누군가에게 그랬을 것이다. 나는 몇 년 뒤, 아무런 연고 없이도 세월호 참사 현장을 서성였던 이를 후배로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을 봤다. <두 개의 문>(2011) 후속작이다. <두 개의 문>은 경찰 특공대원의 진술, 수사기록, 재판 기록, 채증 영상 등을 통해 용산 참사의 진실을 재구성한다. 그 결과물이 워낙 훌륭했던 까닭에 ‘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을까’를 의심하며 극장에 들어섰다. 내가 틀렸다. 참사와 국가폭력을 ‘아이템’으로 다룰 때의 윤리가 무엇인지, <공동정범>은 집요하게 질문하고 성실하게 보여준다. 전작 <두 개의 문>이 경찰은 가해자이고 철거민은 피해자라는 이분법을 부숴버렸던 것처럼, <공동정범>은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 있는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을 무너뜨리고 또 다시 쌓아간다.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방기하고 방치하는 동안 김일란·이혁상의 카메라는 우리가 잊어버린 질문을 환기시킨다. 대체, 무엇이, 해결되었습니까.
나는 그 질문 앞에서 부끄러웠다. 그러나 영화는 죄책감보다 크고 깊다. <공동정범>의 누적 관객 수는 3468명이다(1월28일 기준). 이 영화를 이렇게 초라하게 보낼 수는 없다. 독립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찾아보는 일은 수고스럽다. 시간도, 장소도 마땅찮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수고와 관심이 모여 경고가 될 수 있다. 나는 <공동정범>의 관객 수가 무람없이 국가폭력을 자행했던 지난 정권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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