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프로그램은 방송사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신문의 TV프로그램 안내란에 늘 쓰여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편성표를 보며 '이게 정말 방송될까' 의심하지는 않는다. '방송사 사정'이란 게 적어도 천재지변, 국가안보 위기, 아니면 만민교회 신도들의 방송사 난입 같은 불가항력의 상황 정도는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적 믿음이 뒤집어지는 일이 지난 4일 전후 벌어졌다. 홍수도, 간첩 침입도, 광신도 난입도 없는데 심지어 권력층의 외압도 없었다던데, 방송사들이 저마다 편성계획을 두세 번씩 뒤집은 것이다.
당초 방송사들은 김 대통령의 자유메달 수상장면을 녹화중계하겠다고 발표했다. 2일 KBS는 편성방침을 바꿔 생중계 계획을 신문에 배포했다. 3일 MBC는 계획을 생중계로 바꾸고 4일자 뉴스데스크에서 안내했다. 편성을 재변경한 KBS는 9시뉴스 말미에 다음날 새벽 1시 40분에 녹화중계하겠다고 발표했다. 결과는? KBS, MBC 모두 생중계였다. 신문의 TV프로그램란에 KBS는 밤 11시 10분 생중계로, SBS는 다음날 새벽 1시 녹화중계로 발표됐고 MBC는 다음날 아침뉴스에 삽입할 예정이어서 편성표 상엔 나오지 않았던 터였다.
대통령의 자유메달 수상은 공영방송이나 공영적 방송이 생중계할 사안일 수 있다. 문제는 무원칙한 편성이다. 무슨 상을 받을 때 생중계를 하는지, 일반인과 공직자의 경우엔 어떻게 다른지, 방송사측 사정으로 편성계획을 바꿀 땐 적어도 얼마 전에 공표해야 하는지 하는 원칙이 도무지 있는 것 같지 않다. 더구나 이런 일에 사과하는 방송사도, 경영진도 없다. 제작진이 참여하는 편성위원회를 꾸리자는 시민단체, 방송노조들의 주장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윗분, 타방송사 눈치만 보는 편성관행이 고쳐지지 않을 바엔 차라리 프로그램 안내를 이렇게 내는 게 낫겠다. "이 프로그램은 방송사 마음대로 바뀔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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