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옥자’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반성과 동물학대 및 공장식 기계도축에 대한 반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런 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관객의 죄책감과 허영심을 동시에 건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옥자는 그 전략을 채택하지 않았다. 살짝 비껴갔거나 혹은 일부러 포기했다. 아마도 봉감독은 동물의 이야기만이 아닌,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관객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당신들은 사랑스런 꼬마 돼지를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거대 자본에 의해 사육되고 도축되는 추한 돼지와 같은 신세라고.
물론 좋은 영화는 결국 인간 보편의 이야기,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 한다. 한 마리 돼지 이야기를 하면서 실은 인간이 처한 현실세계와 생존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면, 그야말로 야심찬 예술적·사회적 도전이 될 것이다. 하지만 봉감독의 옥자는 그 도전에 성공했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옥자를 돼지 이야기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인간의 이야기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묘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재미와 감동을 찾는 관객들은 나른한 스토리전개와 옥자의 (아마도 의도적이었을) 못난 비주얼이 마음에 걸렸고, 의미와 통찰을 찾으려 했던 관객에게라면 미리 답을 정해주는 듯한 영화의 태도가 머리에 걸렸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문화부 막내 기자 시절에 한 인터뷰가 떠오른다.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치다’와 ‘음식 혁명’을 쓴 존 로빈스(70)다. 이 사회운동가를 만난 뒤에도 꽤 오랫동안 육식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는 아이스크림으로 잘 알려진 ‘베스킨라빈스 21’ 창업자의 외아들. 그런데도 스스로 상속 포기를 선언하고, 직접 지은 산골 오두막집에서 농사로 자급자족하며 유제품과 육식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환경운동을 10년 넘게 실천하고 있었다.
공장식 축산농장과 기계 도축의 비윤리성이란 이런 것이다. 가로·세로 50㎝를 넘지 않는 닭장 하나에 7~8마리의 닭을 키운다. 이렇게 비좁으니 스트레스로 미쳐 날뛰는 닭들. 선제적 조치가 가해진다. 살아 있는 닭의 부리를 1/3가량 미리 자르는 것. 서로를 쪼지 못하도록 말이다. 돼지도 마찬가지. ‘생식 우리’라는 게 있다. 가로 2m, 세로 60㎝. 걷기는커녕, 몸을 돌리기도 어렵다. 살아 있는 소시지가 따로 없다.
사회운동가든 영화감독이든, 각자의 선의(善意)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은 종종 그 자체로 예술이 되지만, 예술이 삶이 되려면 우선 그 장르 특유의 미학으로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 아름답지 않은 프로파간다는 대부분 실패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무리 정의롭다고 주장하더라도 말이다.
두 마리 토끼만 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다 잡는 것이다. 초등학생 아들을 고기 반찬 앞에서 눈물 짓게 만들고, 그 앞에 마주 앉은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술잔을 기울이며 아들이 살아갈 미래세계를 걱정하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