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넘은 시각, 터널로 들어섰다. 버스와 승용차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그 속도가 날카로운 소음이 되어 밀폐된 터널을 난반사한다. 다행인 것은 차도와 인도가 투명 플라스틱으로 격리되어 있다는 점. 물론 인도의 폭이 좁다. 걸어오다 마주치면 어깨를 부딪혀야 하는 넓이랄까.
한 100m쯤 걷다 보니 영화가 원망스러워졌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 때였다. 터널 반대편에서 실루엣이 나타난 것은. 오그라든 심장을 달래며 자세히 보니 20대 여성의 곡선이었다. 심장의 원상복귀와 함께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시작됐다. 저 여자는 얼마나 무서울까.
교행하려면 어깨를 부딪힐만큼 좁은 인도였다는 전언(前言)을 기억하시는지. 나는 격리대 쪽으로 바짝 붙어섰고, 그녀는 통과했다. 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또 다른 발자국 소리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곡선이 아니라 각진 실루엣. 빠른 속도로 남성이 걸어온다. 순식간에 나를 제쳤고, 그녀와의 거리는 점점 짧아졌다. 다시 심장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심야의 터널, 혼자 걸어가는 여성, 그 뒤를 쫓는 남성. 다른 장르를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궁금해하실 독자 제현을 위해 결론부터. 남녀의 거리는 0이 되었고, 묵직한 목소리가 메아리졌다. “미안, 미안~ 미안~, 내가 잘못, 잘못~, 잘못~.” 하나가 된 실루엣은 터널 반대편으로 빠져나갔고, 호러인 줄 알았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가 됐다.
지난 토요일, 10년의 간극을 두고 그 터널을 다시 통과했다.
이번에도 청춘남녀 때문이었다. 연세대 알렌관에서 있었던 후배의 야외 결혼식. 대학 1학년 때 만난 첫사랑이 11년 만에 결실을 맺은 천연기념물 해피엔딩이라고 했다. 주례없이 열린 그 결혼에서 신랑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로 외쳤고, 신부 아버지는 이런 요지의 농담 겸 덕담을 했다. “신랑 ○○○은 미남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딸 ○○이가 미남이라고 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유쾌한 결혼 때문이었을까. 다시 터널을 통과해보고 싶어진 것은.
연세대 동문을 빠져나오니 봉원사 로터리 앞에 ‘따릉이’ 거치대가 있었다. 지난 번 기자협회보에 썼던 그 서울시 공공자전거다. 한 대를 골라 달리기 시작했다. 10년 전과 달리 중간중간에 ‘긴급전화기’가 보였다. 위급 상황에 사용하라는 것일까. 하지만 그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555m의 터널을 빠져나오자 빛이 쏟아졌다. 독립문의 벚꽃이 소리없는 폭포가 되어 휘날리고, 2시의 태양이 격렬한 찰나를 뿜어내고 있다.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래도 한 발자국씩 더 밝은 곳을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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