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조 국민연금, 자본시장의 괴물로 키울 것인가?

[스페셜리스트 | 금융]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차장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차장.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의 명함에는 기관명이 ‘국민(을 위한)연금’으로 표기돼 있다. 국민 노후를 책임지는 안전판으로서 역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담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런 그가 특검의 1호 구속자가 되고, 국민연금은 ‘최순실의 부역자‘ 노릇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국민연금이 가진 무소불위의 ‘자본 권력’에 있다. 국민연금기금 운용규모는 1988년 5300억원에서 시작해 2003년 처음으로 100조원을 넘어선 뒤 불과 12년 만에 500조원 이상으로 불어났다. 현재 그 규모는 550조원. 코스피 시가총액(1300조원)의 42%에 달한다. 회사 지분 51%를 확보하면 경영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부분 코스피 상장사를 소유할 수 있는 액수다. 단일 기금으로 국민연금이 국민경제와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대부분 대기업이 국민연금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국민연금기금의 성장은 현재진행형이다. 2043년엔 현재의 5배에 달하는 2500조원까지 불어날 전망이다. 이 돈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움직일 경우 한국 자본시장 뿐 아니라 정·재계의 권력구조까지 바꿔놓을 파괴력을 가진다. 정권마다 국민연금을 활용하려고 시도해온 이유다. 대선 때면 빠짐없이 국민연금기금을 선심성 정책에 활용하겠다는 공약이 나온다. 기금의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대기업을 손보겠다는 공언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국민연금공단이 찬성표를 던지도록 외압을 행사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높이자는 탁상공론은 해묵은 레퍼토리다. 기금운용위원회의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하고, 기금운용본부를 국민연금공단에서 떼어 내 별도의 공사를 설립하자는 제안들이 대표적이다. 모두 대증처방일 뿐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 국민연금이란 거대 자본권력이 정권에 의해 사유화되는 구조를 막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주로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기업 오너들의 도덕적 해이를 견제하고 기업 가치를 높이는 소위 ‘연기금 자본주의’는 기금의 운용 목적에도 부합한다. 주주권 행사가 권력의 간섭에 따른 기업 통제수단으로 악용되는 ‘연기금 사회주의’를 우려할 뿐이다. 정부 주도의 지배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국민연금이 권력에 의해 활용되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


기금운용 자체를 시장에 맡기는 게 근본적인 처방이다. 국민연금의 주식시장 투자금을 잘게 쪼개 국내외 자격 있는 민간 운용사들에 전부 위탁하는 방식이다. 실제 세계 최대 공적 연기금이자 한국의 국민연금과 성격이 비슷한 일본 공적연금 GPIF는 위험이 적은 국채 등 채권투자를 제외한 모든 주식을 은행신탁이나 투자자문사 등 민간 운용사들에 맡겨 굴리고 있다. 거대연금 운용의 독립성과 수익성을 담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굴리는 돈이 분산되면 그만큼 권력도 분산되고, 정치적 리스크뿐 아니라 기금의 손실위험도 줄어든다. 국민연금이 직접 굴리는 게 수익률 측면에서 낫다는 일각의 반론은 공무원이 경영인보다 기업을 더 잘 경영할 수 있다는 식의 괴변이다. 기금 운용을 외부에 위탁하면 수수료가 든다는 주장은 자본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구차한 변명으로만 들린다.


향후 2500조원으로 불어나는 국민연금을 정권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자본시장의 괴물’로 키울 순 없다. 이번 사태를 국민연금의 사유화 가능성을 막는 근본 처방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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