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는 없고 색깔만 있다

언론 좌파보도 무엇이 문제인가

정치권 정략적 주장 ‘좌파 보자기’ 포장





“좌파는 없고 색깔만 있다.”

최근 정치권의 ‘이념논쟁’을 지켜본 민주노동당 한 당직자의 일성(一聲)이다. 이인제 고문이 노무현 고문을 ‘좌파’라 규정한 것도 그렇고,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의 ‘좌파적 정권’ 발언 보도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유럽 좌파정당과 유사한 이념적 지향을 갖고 진보를 표방한 민주노동당을 홀대하는 것은 물론, 이런 ‘공세식’ 발언들에 대한 검증은 외면한 채 중계보도로 색깔론만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정치권의 이념논쟁을 계기로 언론의 좌파보도의 문제점을 살펴봤다.



요즘 언론 보도에 ‘좌파’가 유행이다.

‘당 좌경화 막겠다’ ‘급진좌파는 경제에 독약’ ‘현 정부는 좌파적 정권’ ‘노 후보는 좌파 정치인’….

지난달 말께부터 신문들의 주요 지면에 오른 제목들이다. 최근 노무현 고문의 ‘8·1 언론관련 발언’이 논란을 빚기 직전까지 언론의 주요 관심사였다.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이인제 고문이 노무현 고문을, 그리고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김대중 정부를 겨냥해 쏟아낸 발언들이다. 발언의 당사자는 달라도 표적을 모두 ‘좌파’로 규정하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물론, 언론은 노무현 고문이나 김대중 정부가 이를 반박하는 주장을 함께 다뤘다.

이런 좌파 보도에서는 뭔가 공허함이 느껴진다. 공방만 있을 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국장은 “좌파라는 도장찍기는 난무하지만 정작 뭐가 좌파이고 어떤 정책이 좌파적 노선인지에 대한 검증이 없다”고 꼬집었다.

실례로 이인제 고문이 노무현 고문을 ‘좌파’라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한 ‘재벌 주식의 노동자 분배’ 주장의 경우 민주노동당은 “과거 맥아더가 일본에서 이미 실시한 바 있고, 미국 유럽 등 선진자본주의에서 ‘종업원 주식소유제(ESOP)’라는 방식으로 제도화돼 있어 급진좌경의 주장도 사회주의 정책도 아닌 철저한 자본주의 정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좌파 없는 좌파 보도



‘좌파’보도의 공방식 중계 행태는 이회창 전 총재의 ‘좌파적 정권’ 발언 보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이 이런 규정의 근거로 △대북 퍼주기 △의약분업 △건강보험 재정통합 △무리한 교육평준화 정책 강행 등 김대중 정부의 7개 정책을 제시하자 이에 대한 정부와 민주당의 반박을 함께 다뤄주는 게전부다.

한나라당을 출입하는 한 기자는 “어느 쪽 주장에 타당성이 있는지 독자들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다뤄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불가피론을 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춘다는 데 있다.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언론이 분석과 판단의 역할을 포기한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공방식 중계 위주의 ‘좌파’ 보도는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지적된다.

우선, 좌파 부재의 문제.

문화비평가 진중권씨는 최근 언론의 ‘좌파’ 보도에 대해 “존재하는 좌파는 철저히 무시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좌파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민주주의적 이념 지향을 갖는 진보정당에 대해선 외면하면서 특정 정치인의 경쟁자에 대한 정략적 공세를 ‘좌파’라는 보자기로 포장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실제 언론은 연일 ‘좌파’를 제목에 붙이면서도 정작 ‘좌파’가 어떤 이념인지, 또 좌파적 정책노선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는 소홀했다. 이런 작업은 좌파로 지목 당한 특정 정치인의 정책과 노선이 실제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잣대를 세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하지 않았다. 사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인제 고문이 노무현 고문에 대해 “그보다 더 왼쪽”이라며 인용한 민주노동당은 둘째로 쳐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는 프랑스 사회당, 독일의 사회민주당 등 유럽 좌파 정당을 사례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이인제 고문측이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의 말지 인터뷰 내용마저 왜곡한 주장을 사실확인 없이 그대로 옮겨 실을 뿐이었다.

사실 국내 ‘좌파’ 정당에 대한 언론의 홀대 현상은 이전부터 지적돼 온 문제다.

지난해 12월 7일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국회에서 통과됐을 당시를 전후해, 언론은 2년여 동안 이 법의 제정운동을 주도해 온 민주노동당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임동현 정책부장은 “언론사들이 진보정당의 이름을 사용하는 게 부담스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좌파’ 보도의 또 다른 문제는 색깔론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특정 정치인이 좌파의 이념을 갖고 정책노선을 견지하고 있는지를 검증하지 않은 상태에서 ‘좌파’ 또는 ‘좌경’ 등 단정적 표현을 동원한 경쟁자의 주장을 언론이 중계 보도할 경우, 이념갈등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한국적 상황에서 이는 색깔 공세에 편승한 덧칠하기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본질 외면, 색깔론 확산만



노무현 고문에 대한 이인제 고문의 잇단 ‘좌파’ 발언 보도의 경우도 이 고문의 주장이 공세로, 노 고문의 반박이 수세적인 해명으로 비쳐짐으로써 그 낱말의 자극성만큼이나 노 고문에게 ‘불순한’ 이미지를 고정화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창룡 인제대 교수(신문방송학)는 “한국적 상황에서 좌우파 논쟁이 가속될 경우 유력 후보에게 색깔론을 씌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일부 정치인이 정략적 차원에서 색깔론 발언을 할 경우 언론은 받아쓰는 데 머물지 않고 증거가 있는지를 먼저 따져서 보도하는 관행이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색깔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사회가 이념문제에 민감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김재홍 경기대 교수(정치학)는 “우리 사회에서 ‘좌파’, 또는 ‘사회주의’라는 표현은 본래 의미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일종의 고발이다. 북한이나 공산진영의 물리적, 폭력혁명노선을 지지하는 것처럼 비쳐지게 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라며 “이런 현실에서 언론이 정치인의 발언이라고 해서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색깔론에 편승하는 태도”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 97년 대선 직전 불거진 오익제 편지 사건의 경우 결과적으로 안기부의 공작이었음이 드러났지만 당시 언론은 김대중 국민회의의 “조작”이란 항의보다는 안기부 발표에 더 무게를 두고 보도함으로써 김 후보에게 ‘친북’ 이미지를 덧씌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물론, 최근의 좌파 논쟁을 이처럼 직접적인 ‘친북’시비로 비화되는 전통적 색깔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념적 프리즘의 폭이 좁은 한국적 현실에서 근거 제시 없이 ‘좌파’로 규정하는 것은 또 다른 색깔론이며 이를 검증 없이 인용보도하는 것은 이의 확산에 다름없다. 군사독재시절 숱하게 과대포장된 공안사건 보도를 접하며 ‘좌경은 용공이고, 용공은 곧 친북’이란 주입된 인식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비평가 진중권씨는 최근의 이념 논쟁 양태를 ‘신종 색깔론’이라고 꼬집었다. “과거 색깔론은 주로 북한과 연관돼 국가관, 통일관 등을 문제삼는 ‘반공주의’였다면 최근엔 자신보다 왼쪽에 있으면 무조건 좌파로 몰아붙이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언론 보도 역시 이런 신종색깔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씨는 덧붙였다.

김동원 기자 [email protected] 김동원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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