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 세종살이 3년 "살만해졌다"

동호회 만들어 외로움 달래
기자들 현안 놓고 토론도
취재차 잦은 서울행 여전

그해 겨울엔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수북이 쌓인 황량한 땅 위에 건물 몇 채가 솟아 있었지만 대부분 공사가 한창이었다. 처음 발을 디딘 사람들은 이곳을 시베리아에 비유했다. 정부세종청사는 그렇게 ‘세베리아(세종+시베리아)가 됐다.


“허허벌판이었다. 막 지어진 1단계 입주 정부부처 건물을 제외하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마저 모두 완공된 것도 아니었다. 어렵게 연결한 인터넷은 자주 끊겼고 핸드폰도 잘 터지지 않았다. 그때 마침 눈이 많이 내렸다. 제설작업도 잘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세상과 고립된 시베리아 같았다.”


2012년 말 국무조정실, 기획재정부 등 1단계 입주가 시작되자마자 세종에 내려온 ‘세베리아 1세대’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청사 주변에서 네비게이션을 켜면 도로가 아니라 논밭을 달리는 것으로 표시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세종시는 안개가 심하게 끼는 곳으로 이름 나 있다. 사진은 출근시간 안개가 짙게 낀 세종정부청사 인근 도로의 모습.(정진우 머니투데이 기자 제공)

지난 11일 첫 입주 시작 3주년을 맞아 찾은 정부세종청사는 상상 속 ‘세베리아’와는 사뭇 달랐다. 출근길은 북적였고 각종 음식점, 카페로 빽빽하게 채워진 상가건물이 청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세종에 상주하는 기자는 200여명. 가족 모두 내려와 이곳에 터를 잡은 기자도 있고 동료와 함께 지내다 주말엔 서울로 올라가는 이들도 많다.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매일 출퇴근 하는 기자도 여럿이다.


세종청사 이전 3년이 흐른 지금 “이제야 사람이 살 만해졌다”는 게 기자들의 반응이다. 처음 세종에 내려왔을 때에 비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란다.


정진우 머니투데이 기자는 3년 전 아내, 4살 난 아들과 함께 세종에 내려왔다. 처음엔 제대로 된 사회기반시설 하나 없는 곳에 살려니 막막했지만 지금은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서울에선 한 시간 이상 걸렸던 출근시간이 10~20분으로 줄었다. 그만큼 아들과 놀아주는 시간은 늘어났다. 출근 전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기도 한다.


퇴근 후 딱히 갈 곳이 마땅찮은 기자들은 동료들과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세종 기자 운동모임인 세기농(농구), 세당회(당구), 세탁회(탁구)가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매달 1~2차례 정기적으로 만나 경기를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한다. 부처 운동팀과도 대결을 하곤 하는데, 얼마 전엔 여자농구팀인 청주 KB스타즈와 친선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과천청사에 출입했던 정 기자는 세종 생활은 다른 출입처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정 기자는 “과천에선 타사 선배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고 경쟁의식도 심했다”며 “세종에선 매일 같이 지내고 운동하다보니 대화 기회가 많아졌다. 기자들끼리 기사나 사회현안을 두고 토론하는 문화도 생겼다”고 전했다.


▲세종시 기자 농구모임 ‘세기농’ 선수들의 단체사진. 여자농구팀 KB스타즈와 친선경기를 한 뒤 서동철 KB스타즈 감독(가운데)과 사진을 찍었다.

선후배들과 한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A기자는 “세종생활은 엠티를 왔는데 엠티가 끝나지 않는 것이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월요일 아침에 세종으로 출근해 목요일 오후 서울로 돌아오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서울에서도 해야 할 취재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설명했다.


세종청사 출입 기자들도 일주일에 2~3일 이상은 서울에 간다. 국회로 향하는 공무원을 따라가거나 취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의 중요한 브리핑이 서울청사에서 열릴 때도 있다. 이때 장소가 세종인지 서울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또 종종 서울에서 취재원과의 저녁 약속이 잡히기도 한다. 취재원에게 세종까지 내려오라 할 수 없으니 또 올라 갈 수밖에. 그때마다 길에서 시간을 보내는 ‘길기자’가 되기 일쑤다.


세종의 안개는 악명 높다. 불과 수십 미터 앞의 건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 탓에 불만의 목소리도 많다. 하지만 대형마트와 영화관이 들어선 지금 세종살이 불평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지난해 말 생긴 대형마트는 지금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전엔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대전까지 나가 장을 봐야했다. 취미나 아이들 교육을 위한 문화센터도 없었다. 대형마트가 생기자 세종주민들뿐 아니라 기자들도 환호했다. 세종 최초의 대형마트 두 곳이 차례로 생긴 뒤 기자들은 “드디어 세종에서도 쇼핑을 할 수 있다”며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했다. 몇 주 전엔 영화관까지 생겨 문화생활을 제대로 즐길 수도 있게 됐다.


기자들은 아직은 부족하지만 대체로 세종생활에 만족하는 분위기다. ‘찜질방, 목욕탕, 대형병원’만 생기면 이제 ‘완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앞으로 더 발전해 나갈 세종에 대한 기대도 크다. 박병률 기자는 “전국 어디든 2시간 안에 갈 수 있는 세종에 있으니 국가 전체를 보는 눈이 넓어진 것 같다”며 “신도시 중에서 이렇게 빨리 자리 잡은 곳은 없다. 이제 세종의 긍정적인 모습이 많이 부각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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