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과 '작은' 성공

[스페셜리스트 | 문학·출판]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최근 동덕여대에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2학년 학생 450명을 대상으로 한 교양강의였는데, 당연히 처음에는 사양했다. 여고 문예반 시화전에 초대받았다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돌아왔던 고교 시절의 참사가 생각나서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소위 ‘헬조선’ 시대를 살고 있다는 우리 시대의 청춘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말이 아득해서였다는 게 정직한 이유일 것이다.


특강 청탁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곳은 통영의 작은 출판사, ‘남해의 봄날’이었다. 얼마 전 기사로도 인용했지만, 2년 전 경남 통영의 이 작고 예쁜 출판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 서울 큰 출판사도 힘든데, 남도의 초미니 출판사에서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기획안 대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기획안 제목은 ‘가업을 잇는 청년들’. 대부분 대도시·대기업만 바라보고 있는 요즘, 3대째 대장간을 지키는 청년, 스스로 농사를 선택한 20대 처녀, 전국의 5일장을 도는 족발장수 등 작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걷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출판계의 ‘작은 기적’이지만 그 때만 해도 거의 완전한 무명. 서울의 속도와 규모에 탈진해 떠났던 정은영 대표가 큰 무리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거둔 성과였다.


특강에서는 두 개의 형용사를 강조했다. ‘작은’과 ‘좋아하는’. 전세계적으로 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시대, 이제는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이다. 출판에서도 ‘대박 베스트셀러’는 로또처럼 예외적 확률이 되어 버렸다. 비즈니스로 출판을 우선했던 사람들에게 출판은 더 이상 매력 있는 산업이 아니다. 하지만 활자에 매혹된 당신이라면, 화장실에도 반드시 읽을거리를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당신이라면 조금 다를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 물론 조건은 있다. 예의 그 ‘작은’과 ‘좋아하는’이라는 형용사 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작은 성공에 만족하기. 실제로 출판 담당 기자를 하면서 이런 세계관으로 책을 펴내는 1인 출판사, 작은 출판사들을 자주 목격한다. 그들의 책은 내용에서도 같은 세계관을 담고 있다.


경남 진주의 지역출판사 펄북스가 최근 펴낸 책의 제목은 ‘동네 도서관이 세상을 바꾼다’. 동네 도서관이 세상을 바꾼다니,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11평 소박한 방에서 시작한 도서관이 바꿀 수 있는 건, 결국 사람의 마음이더라는 것. 동네 사람들이 자신이 아끼는 책을 서로 가져와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서로의 오해를 풀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합의하다보니 세상이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시스템 문제는 그것대로 당연히 바꿔야 하겠지만, 결국 세상의 변화는 내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 아니겠는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그리고 적게 쓰고 적게 먹으며 만족을 누리는 것. 어쩌면 성장률 0의 세상에서 행복을 찾기 위한 취향공동체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헬조선’ 시대에 대처하는 각자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사멸한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개천용’이라는 연예인을 꿈꾸고, 또 누군가는 ‘헬조선’을 포기하고 이민을 떠나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각각 예외적 재능을 타고났을 때만 가능한 확률이라는 것, 또 그 나라라고 절대 만만한 땅은 아니라는 선배들의 수기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금숟가락도 은숟가락도 물고 태어나지 못했다면, 가장 좋은 선택은 ‘작은’과 ‘좋아하는’ 두 형용사의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더 화려한 세계와 거창한 꿈을 이야기하지 못해 미안했지만, 고맙게도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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