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다 못한 한국 언론"

BBC·AP 노근리 끈질긴 추적 진실 접근…우리언론 '받아쓰기만'

“언제까지 받아만 쓸 것인가.”

AP통신의 노근리 학살보도의 뒤를 이어 지난 2일(한국시간) 영국의 BBC방송이 6·25전쟁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도한 것을 계기로 언론계 안팎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문제제기다.

지난 99년 AP통신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보도할 당시 사설과 칼럼 등을 통해 스스로를 자책하고 반성했던 언론이 BBC의 다큐멘터리를 다루면서 또 받아쓰기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지난달 25일 BBC가 1년여에 걸친 현지 취재와 자료수집을 거쳐 제작한 다큐멘터리 ‘Kill’em All (모두 죽여라)’를 방영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하자 이를 자세히 소개하는 기사를 일제히 게재했다. 언론은 또 2일 BBC가 보도한 내용 가운데 ‘새롭게’ 밝혀진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곡안마을과 포항시 여남동 송골계곡에서도 양민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도 비중있게 보도했다.

하지만 BBC가 보도한 마산 곡안리와 포항시 송골계곡의 경우 지난 99년 AP통신의 노근리 사건 보도 이후 해당 지역에 희생자 유가족 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진상규명 요구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지역 언론에 이미 기사화됐다. 포항 여남동 송골계곡 사건의 경우 경북일보가 지난 99년 11월 사회면 머릿기사로 다뤘다.

또 언론이 BBC의 다큐멘터리 내용을 인용해 6·25 당시 양민학살이 벌어진 곳이 60여곳에 이른다고 보도한 것도 사실은 AP의 노근리 보도 이후 전국 각지에서 봇물처럼 제기된 피해자와 유족들의 진정 사례를 집계한 결과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는 이런 진정 사례와 관련 피해자 증언 등을 이미 수집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BBC 다큐멘터리와 같이 미국에 오랜 기간 체류하며 문서 보관서에서 새로운 관련자료를 찾아내고 당시 참전했던 수십명의 미군을 인터뷰하기가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지난 99년 노근리 사건을 심층 취재했던 AP통신의 최상훈 기자는 “문서를 발굴하고 참전 군인들을 일일이 찾아가 인터뷰하기가 외국 언론에 비해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파고들고 적극적으로 취재에 나선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미국의 문서 보관소에 대한 접근은 BBC 역시 미국언론이 아니었던 만큼 우리보다 크게 유리한 조건이라고 볼 수 없다. 또 미국 현지에서 참전 군인들의 증언을 확보하는문제도, 더 이상 언어 문제를 탓할 국내 언론은 없을 것인 만큼, 얼마나 끈질기게 접근하느냐에 따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AP의 최 기자는 “참전 군인의 증언을 얻어내기 위해 수백통의 이메일과 전화를 주고 받았다”고 말했다. 국내의 피해자 증언을 확보하는 것은 우리 언론이 더 유리하다. 전담 취재팀의 경우도 AP의 노근리 취재팀이 3명, 이번 BBC 다큐멘터리 취재팀이 4명이었던 점을 볼 때 구성이 불가능한 것도 아닌 수준이다. 언론이 민족사의 비극 속에서 잊혀진 진실을 찾아내겠다는 의지만 있었다면 팀 구성은 물론 충분히 추적 보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과 관련해 노근리 등 양민학살문제를 전담취재해 온 문화일보 김충남 기자는 “잊혀졌던 역사적 진실이 외국 언론에 의해 밝혀지는 현실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라며 “이제는 국내 언론도 자체적으로 한국전쟁과 관련한 기획과 르포 등을 통해 양민학살과 관련한 진실을 밝힐 때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는 4일 성명을 내고 “언론은 사대주의 근성으로 남의 나라 언론이나 인용 보도하는 데 그치지 말고, 100만 민간인 학살의 실상을 주체적으로 취재, 조사해 알리고 그 해결을 촉구하는 데 앞장서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김동원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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