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헬렌 토마스' 가능하다

[관훈클럽 정년연장 세미나]
고참기자 활용 한 목소리
탐사보도팀 모델 등 제안
경영진·간부들 의지 중요
언론환경 변화 공부해야

“한국에서 헬렌 토마스 같은 기자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미국 백악관을 50여년 동안 출입했던 헬렌 토마스 기자는 80대 후반까지 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한국의 헬렌 토마스’ 등장은 아직까지 요원한 일이다. 오는 2016년부터 정년 60세 연장이 의무화됨에 따라 기자들의 직업 수명이 2~5년까지 늘어날 전망이지만 일부 언론사들은 시니어 기자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2일 관훈클럽과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로 제주도 서귀포 KAL호텔에서 열린 ‘정년연장 시대 언론인의 전문성 강화 및 활용 방안’ 세미나에서는 시니어 언론인들의 전문성과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모델들이 제시됐다.


이날 발제를 맡은 이완수 동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정년연장으로 뉴스룸이 갈수록 노령화되고 있지만 정작 이들을 활용할 구체적인 방안은 보이지 않는다”며 “경험과 혜안이 풍부한 시니어 기자 활용방안은 저널리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의 주제”라고 강조했다.


▲지난 22일 관훈클럽과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로 제주도 서귀포 KAL호텔에서 ‘정년연장 시대 언론인의 전문성 강화 및 활용 방안’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4 한국언론연감’에 따르면 2013년 신문 산업의 기자직 종사자 가운데 50세 이상이 전체의 23.4%를 차지했다. 일간지의 경우 50세 이상 기자직은 2012년에 비해 53%나 증가했다. 이 교수는 “갈 자리는 한정돼 있는데 보내야 할 사람은 많아져 수급불일치 구조가 불가피하다”며 “시니어 기자들이 주로 맡았던 선임기자, 전문기자, 대기자제가 정착돼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일부 언론사가 야심적으로 추진했던 전문기자제는 아예 없어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또 국내 언론계의 폐쇄적 출입처 제도, 수직적 기수문화 등이 시니어 기자들의 역할을 축소시킨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교수는 시니어 기자 활용 방안에 대해 탐사보도팀 모델, 국제뉴스 대기자제 모델, 전문기자화 모델, 팩트체커팀 모델, 기사 에디터팀 모델, 지면별 리뷰팀 모델, 콘텐츠 아이디어 기획팀 모델, 온라인뉴스 생산 모델, 주말판 전담제작 모델, 뉴저널리즘 개발팀 모델 등을 제안했다. 그는 “한국 언론의 최근 위기는 저널리즘 품질 문제에 기인한다”며 “시니어 기자들이 축적한 지식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환원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토론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시니어 기자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20년째 여행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자신이 과연 ‘생산적인 기자’인지 자문하고 판단해야 한다”며 “여행전문기자를 시작하면서 나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기자들 스스로가 경쟁력을 갖춰야 하며, 주니어 때부터 이러한 교육을 시켜야 정년연장으로 인한 고민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자와 전문기자, 선임기자 등이 활동하고 있는 한겨레는 시니어 기자 활용의 좋은 사례로 평가받는 언론사 중 하나. 성한용 한겨레 정치부 선임기자는 ‘선후배간 자유롭게 소통하는 조직 문화’와 ‘선임기자를 편집국 각 부에 배치했다는 점’을 안정적인 제도 정착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성 기자는 “(한겨레 선임기자 제도는) 기자들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돌파해서 만들어온 측면이 크다”면서 “회사마다 사정이 다르고 경영진과 간부의 의사가 중요하다. 각 언론사가 (시니어 기자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조사해 정보를 공유한다면 경영진뿐만 아니라 시니어 기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니어 인력 활용은 언론 환경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도식 SBS 스마트미디어사업팀장은 “신문이나 방송의 무대가 모바일로 옮겨가고 있는데 회사의 주축을 맡고 있는 고참기자들이 모바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큰 문제”라며 “내부적으로는 반성이 필요하고, 대외적으로는 재교육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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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18명의 기자들은 시니어 기자 활용 방안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그 중 주요 패널들의 발언을 정리해 싣는다.

홍찬식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개인적으로 언론인들이 갈 수 있는 진로 중 하나가 대학이 아닌가 싶다. 전문성을 가진 기자라면 해당 분야로 나아갈 수 있고, 일반 기자들은 매스컴을 교육하는 쪽으로 진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외국과 비교해서 우리나라는 학계에 언론인 출신을 받아들이는 데 폐쇄적인 느낌이다. 언론학과 등을 보면 커리큘럼이 이론 중심으로 짜여 있어 현장의 시각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철근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문기자가 (특정 분야를) 독점하고 있으면 후배들이 벽을 넘기가 쉽지 않다. 그 사람이 은퇴할 때까지 후배들이 안 길러지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박민 문화일보 정치부장
“저널리즘이 팔아야 하는 것은 뉴스가 아니라 신뢰다. 디지털 시대를 준비해야 하지만 그걸 채우는 게 결국 콘텐츠다. 언론사들은 앞으로 전문화된 소수의 고급인력이 남아 콘텐츠를 판매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신뢰받고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성을 확보하면, 정년에 상관없이 변화하는 언론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순녀 서울신문 문화부장
“본인이 아무리 (전문기자를) 하고 싶어도 회사에서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꿈이 꺾일 수밖에 없다. 타사도 마찬가지겠지만 인력이 부족하다. 전문성을 강화하고, 이를 발휘하라고 얘기하기가 난망한 수준이다. 기획기사를 요구하고 싶어도 후배들이 ‘왜 선배들은 데일리 기사를 쓰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시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최근 희망적인 사례가 있다. 지난달에 정년퇴직을 한 선배인데, 정년을 1년 남기고 여성가족부에 출입하며 ‘가족 남녀’라는 양성평등 기획을 썼다. 대학로에 가족연구소를 만들고 강연도 하는 등 정년 이후 앞길까지 설계한 좋은 사례다.”

이동헌 YTN 미디어사업국장
“경영진 입장에서 ‘고임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시니어 기자에 대한 악순환을 만든다. 시니어 기자들을 활용하는 성공 사례가 많이 알려지고 공유가 돼서 문화적으로 확산돼야 한다.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노현 매일경제 증권부 기자
“언론재단에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시니어 기자들을 회사의 자산으로 보기보다 비용적인 관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결코 잉여인력이 아니며 ‘이런 활용과 성공사례가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려줬으면 한다. 또한 의사결정자들이 뉴미디어 관련 인식이 부족해 투자에 인색하다. 온라인 뉴스편집 등 인력활용 방안이 많은데, 이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권태호 한겨레 정치부장
“신문사 편집국에서 더 필요한 사람은 전문기자보다 현장 반장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신문의 질이 결정된다. 저는 신문사에서 제너럴리스트가 70~80%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포진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기자는 그렇지 않지만 대부분의 제너럴리스트들은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벽에 부딪힌다. 이에 대한 교육과 토론이 더 집중돼야 하지 않을까.”

강진구 경향신문 노동전문기자
“매체 간 경쟁으로 좋은 기사보다 잘 팔리는 기사들이 강조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기자상을 받은 작품도 실제 조회 수는 몇천 건에 불과하다. 시리즈 할 때마다 두 개면씩 차지하는 심층기획이라는 게 회사 입장에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다. 시니어 기자들의 심층기획은 민주적 여론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 되고 공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망 사업자에게 돌아가는 수익금 중 일부를 미디어균형발전기금 형식으로 부과하는 방안이 검토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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