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으로서 직장과 직업중 선택하라면 나는 단연 직업이라고 대답하겠다"

고 송건호 선생 어록과 일화

<어록>



청암 송건호 선생의 언론 문제와 관련한 사색의 단상들을 그의 칼럼집과 회고글 등에서 추려봤다.

▶흥에 겨워 좋아라고 마구 파헤치고 써갈기고 하는 일은 없을까? 신바람이 나는 취재의 뒤편에서 남 몰래 울고 있을 시민은 없을까? 신문이 진정 독자의 벗이요, 시민의 반려라면, 차라리 이름 없고 약한 시민의 인권과 명예를 위한 벗이 되어야 할 것 아닌가.(칼럼집 ‘새역사의 모색’에 실린 69년 4월 ‘민중의 반려’란 제목의 칼럼)

▶저널리즘이란 일상적인 것이 상대다. 미래도 과거도 아닌 오로지 ‘오늘’ 속에 생명이 있다. ‘오늘’을 기록하고 파헤치고 따지고 문제삼는 곳에 저널리즘의 정신이 있다. ‘오늘’ 아닌 미래의 청사진 쪽으로 비중이 커지는 것은, 그만큼 현실 도피적 심리 작용 때문이 아닐까. 비평 정신의 위축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널리즘이 ‘오늘’ 앞에 대담 솔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저널리즘을 위해서나 권력을 위해서나 슬퍼해야 할 현상이다.(70년 1월 ‘저널리즘의 정도’란 제목의 칼럼)

▶신문의 제작은 어느 개인이나 어느 계층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국민 전체를 위해서 제작되어야 한다. 국민 전체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신문, 여기에는 큰 용기와 함께 세심한 조심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73년 6월 ‘자기반성’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신문사는 특정 정당을 무조건 지지해서도 안되며 무조건 반대해서도 안된다. 신문기자는 어느 정치세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사회정의를 위해서 독립된 입장에서 공정히 신문을 제작해야 한다.(‘고행 12년, 이런 일 저런 일’중에서)

▶언론이라는 막중한 영향을 미치는 직책의 특수성을 비추어볼 때 ‘직장에 충실할 것이냐’, ‘직업에 충실할 것이냐’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단연 직업에 충실하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행 12년, 이런 일 저런 일’중)

▶신문이 자립해야 한다는 것은 신문기자가 소신에 따라 신문을 제작하고 무엇을 반대하거나 찬성하더라도 기자의 양심에 따라 기자가 책임을 지고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행 12년, 이런 일 저런 일’중에서)





<일화>

“분단된 조국에선 관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선택한 언론인의 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영원한 기자’였던 청암 송건호 선생.

한국 언론의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청암 송건호 선생의일화들은 그의 선비적 풍모와 청빈함, 그런 가운데서도 주위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정겨움으로 얽혀 있다.

특히 그의 청빈은 오늘도 촌지로 논란을 빚는 세태를 꾸짖는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현업 시절엔 친구가 찾아와도 차(茶) 값이 없어 다방엘 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 집에서는 치약을 뒤집어서까지 쓰고 바깥에서는 택시를 잡으려는 후배에게 토큰을 건네주곤 했다.

그런 이유로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국장전용차 기사에게서 “동아일보 편집국장 자리가 보통 자리인 줄 아느냐. 눈 딱 감고 계시면 돈을 아주 많이 버는 데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듣기도 했다. 한겨레신문 사장 시절엔 판공비로 나온 돈을 “나는 술도 못마시고 담배도 못피우고 교제를 안하니 안쓰겠다”고 거절했다. 청암은 94년 3월 호암상 수상과 함께 받은 5000만원의 상금 가운데 4000만원 가량을 묵은 빚 갚는데 썼다고 한다.

청암의 청빈은 ‘고행 12년, 이런 일 저런 일’이란 회고문에 실린 ‘쇠고기와의 인연’이란 에피소드에서도 잘 드러난다.

“30대에 나는 쇠고기가 참 먹고 싶었다. 그러나 쇠고기를 살 돈이 없어 고기 소원을 못 풀고, 40대가 되면서 수입이 늘고 생활에 다소 안정이 생겼으나, 이렇게 결국 신문사를 떠나게 되어 궁한 생활이 또 시작되었다. 쇠고기와 나는 인연이 없는 것만 같다.”

청암은 또 지조를 잃지 않는 선비였다. 유신정권 때 5번과 전두환 정권 시절 10번, 모두 15번에 이르는 관직 ‘유혹’을 한마디에 뿌리친 일은 불의한 정권과는 타협하지 않은 그의 기개가 범인의 경계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청암은 유신정권의 ‘괘씸죄’에 걸려 취직을 하려면 청와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지난 76년 청암이 동아일보를 사직한 뒤 어렵사리 모대학에서 시간강사 자리를 구했는데, 한 학기가 끝나자 학교쪽에서 “정보부가 당신은 쓰지 말라고 해서 못쓴다”며 그만 두라는 통보를 받기도 했다.

한편, 청암은 지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할 줄 아는 다감한 사람이기도 했다. 80년대 초 그가 참여했던 ‘거시기 산악회’ 멤버들은 산행을 할 때 회원 수만큼 요구르트를 준비해오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또 <말>지 편집을 끝낸 실무진들에게 꼭 점심을 사주면서, 돈이 약간 모자를 때엔 스스럼없이 “누구 1000원 없나”고 물으며 정겨움을 표시할 줄 아는 선배이기도 했다. 김동원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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