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하나는 ‘노벨상 콤플렉스’의 극복.
2년 전 김기덕 감독이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을 때 그런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칸·베네치아·베를린 등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우리나라가 최고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척 기뻤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수상을 계기로 문화에서조차 금메달에 집착하는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가장 자주 들었던 질문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한국 문학의 노벨문학상과 한국 영화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가능성 여부. 우리 문화의 자긍심에 대한 민족적 응원이라고 이해했지만, 어느 때는 지나치지 않은가 싶을 만큼의 집착이었다. 문학이나 영화는 국가 대항 올림픽이 아니고, 숫자를 우선하는 등수 놀이 게임과는 다르다. 이제는 수상에 몰두하기보다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문화를 즐기고 향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콤플렉스 극복’을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질문의 방식이 변화해야 함을 느낀다. “이번 노벨문학상을 누가 받을 것 같으냐”가 아니라 “당신은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면 좋겠냐”로 말이다. 이건 결국 문화적 취향과 문화적 향유 수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런 기억이 있다. 2년 전 경주에서 열렸던 국제 펜(PEN)대회 취재 현장에서 두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인터뷰했을 때다. 저항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나이지리아 작가 월레 소잉카와 프랑스의 소설가 르 클레지오였다. 인터뷰에서 두 작가는 각기 다른 문학관을 내세웠다. 소잉카는 독재 권력에 대한 투쟁이 자기 문학의 엔진이라고 했고, 르 클레지오는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했다. 1980년대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살고 있다면 소잉카에 대해 지지를 보냈겠지만 2014년 현재는 르 클레지오의 고백에 더 공감했음을 고백한다.
우리에게는 해외에서 따오는 금메달 하나에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해외 영화제에서 작은 상 하나를 받아도 언론에 대서특필되던 시대도 있었다. 전쟁과 가난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이고, 지금도 기쁜 일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금메달만 추앙했던 올림픽조차 이제는 ‘최고’보다 ‘최선’에 박수를 보내는 세상이다. 200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 작가 나이폴의 소감 인터뷰를 이 자리에서 소개한다. “매우 놀랐다. 나는 나 자신 이외에 어느 것도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는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고 향유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그런 정도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은 된 것이 아닐까.
“올해도 노벨문학상은 한국을 비켜갔다”며 비분강개할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상을 받아서 행복하다”는 대화가 더 자주 오르는 대한민국이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절대 빌려주지 않는 책을 물어보면,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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