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보 전 동아투위 위원장 부고 기사 한 줄 없는 동아일보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기자, PD, 아나운서 등이 자유언론실천선언식을 열고 있다.

 

성유보 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의 부고 기사는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리지 않았다. 동아닷컴 부고란에도 ‘성유보 별세’는 없었다. 고인은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7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75년 해직됐다.

 

기자 초년 시절을 동아에서 보냈던 고인에게 동아일보는 한 줄의 부고도 허락하지 않았다. 반면 경향신문, 매일경제, 서울신문, 서울경제, 세계일보, 한국일보, 한겨레 등 다수 신문은 9일자 ‘사람들’면에 성 전 위원장의 부고를 알리며 애도를 표했다.

 

동아일보의 침묵은 1975년 3월 고인을 포함한 기자 110명을 강제 해직한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영구집권을 꾀했던 박 정권의 방해세력은 언론이었다. 기사를 사전검열하고 기자실을 폐쇄했다. 언론통제에 맞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과 MBC 등 언론사 기자들이 저항했고 그 절정은 1974년 10월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이었다.  

 

고인을 비롯한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년 10월24일 오전 9시 ‘자유언론실천선언’이라 적힌 족자를 편집국 기둥에 내걸고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10·24선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 사회존립의 기본요건인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다.

1.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사 기자일동

 

기자들은 선언 내용을 지면과 방송을 통해 보도할 것을 요구했다. 경영진이 반대하자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제작을 거부하고, 편집국 및 공무국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경영진이 기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의 내용이 지면에 실렸다.

 

동아일보의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이어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하고, 한국일보 기자들도 ‘민주언론수호를 위한 결의문’을 발표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은 전국으로 확산돼 전국 31개 신문·방송·통신사 기자들이 선언과 서명에 동참했다.

 

10·24 선언이 나오자 그동안 언론의 무능을 규탄하던 대학생·종교계·정당 등 각계에서 격려가 잇따랐고,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영국 가디언, 일본 아사히신문 등 세계 언론들도 한국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상세히 보도했다.

 

▲1975년 1월14일 '육군중위' 이름으로 게재된 격려 광고를 트집잡아 육군보안사령부가 광고국장 등 3명을 연행하자 동아일보 기자들이 항의 집회를 갖고 언론자유만세를 부르고 있다.

 

언론자유운동이 봇물 터지자 박정희 정권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동아일보 광고탄압이 그 신호탄이었다. 정권의 압력을 받은 광고주들은 동아일보에 무더기 광고계약을 취소했다. 동아일보 광고탄압은 1974년 12월20일부터 1975년 7월14일까지 무려 7개월 간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아, 너마저 배신하면 이민 갈거야!‘라는 어느 소녀의 그 유명한 격려광고 등 국민들의 응원이 쏟아졌다. 1975년 1월에만 2943건의 격려광고가 실렸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1975년 3월8일과 10일에 걸쳐 20여명의 기자를 해임했다. 이에 항의하며 기자, PD, 아나운서들은 제작 거부와 편집국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송건호 편집국장은 김상만 사장에게 “전원 복직만이 사태 수습책이고, 그렇지 않는 한 동아는 훗날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사표를 냈다.

 

3월18일 새벽, 경영진은 해머와 각목으로 무장한 행동대원들을 동원해 기자, PD, 아나운서 등 150여명을 거리로 내쫓았다. 거리로 내몰린 기자들은 3월18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었고, 2014년 10월 현재까지 명예회복과 원상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고인은 이 모든 과정에 앞장섰다. 고인은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한겨레에 연재한 ‘길을 찾아서’에서 1975년 3월18일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3월18일 마침내 회사는 200여명의 폭력배와 총무국·판매국 사원 등을 동원해 새벽 3시 통금(자정~새벽 4시 통행금지 시간)인데도 농성 사원들을 회사 밖으로 몰아냈다. 2층 공무국 농성 기자 23명, 3층 편집국·출판국 기자 83명, 4층 방송국 사원 40여명 순으로 강제해산시켰는데 2시간가량이 걸렸다. 3층 편집국에서는 임시 분회장을 맡고 있던 고 안종필 위원장의 지휘로 침입자들을 잠시 몰아낸 뒤,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다시 낭독하고, ‘우리 승리하리라’ 노래를 합창했다. 만세삼창에 이어 ‘애국가’를 부른 우리는 ‘10·24 선언’ 이후 편집국에 내내 걸려 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걷어들고 스스로 편집국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동아일보사에는 두 번 다시 ‘언론자유의 혼’이 깃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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