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19c 정치게임' 재현한 방일취재
전 대통령 외유 동행 '비상식적'···국내문제 집착 '답답'
지난 5월 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방일 일정이 3일부터 15일까지로 확정되자 '상도동 기자'로 분류되는 한나라당 출입기자들은 김 전 대통령 수행취재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고급 옷 로비의혹 사건'의 파장이 여전히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는데다 3일은 하반기 정국의 최대 변수가 될 6·3 재선거 투표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의 방일 일정은 일본 2개 대학에서 강연과 무라야마 도미이찌 전 총리와 만찬이 전부였다.
우리 정치가 상식적인 궤적에 따라 움직인다면 현직도 아닌 전직 대통령의 이같은 해외나들이 취재에 200만원에 가까운 경비를 지원할 언론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3일 김포공항에는 중앙 및 지방일간지와 월간지 및 주간지 기자 13명이 큼직한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상도동 안방정치와 통영 발언, 5·18 발언 등으로 이어진 김 전 대통령의 최근 행보와 지역감정을 등에 엎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이 이들 언론사 데스크들의 기사후각을 자극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 역시 데스크의 기대대로 좋고 나쁨을 떠나 뉴스메이커 역할을 충분히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출국부터 김포공항 페인트 세례 사건으로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수행기자들은 비행기 탑승 직전까지 사건 진행상황을 정신없이 데스크에 보고했고 탑승 뒤에는 김광일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공식 성명을 핸드폰을 통해 전달해야 했다.
시작부터 법석을 떤 수행취재는 자연스럽게 강행군으로 이어졌다. 예정보다 5시간 늦게 일본에 도착한 김 전 대통령은 수행기자단이 짐을 풀기도 전에 기자회견을 자청,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기존 독설을 되풀이한 뒤 김 대통령의 IMF 책임론을 제기했다. 또 연내 내각제 개헌을 촉구하면서 김 대통령의 정치적 임기가 99년 말로 끝난다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당연히 수행기자들은 기사작성과 송고를 위해 저녁식사를 걸러야 했고 이같은 일정은 이미 언론에 보도된 대로 수행기자단이 귀국하는 하루 전날까지 되풀이 됐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이번 방일 기간 중 주일 대사관에 일절 협조요청을 하지 않음에 따라 기사작성이나 송고 등을 위한 준비가 거의 갖춰지지 않아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불편이나 예상 외로 빡빡했던 취재일정이 아니라 김 전 대통령이 일본 공식일정에서 보여준 일련의 발언 및 행보와이를취재해야 하는 기자로서의 입장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4일 규슈국제대학에서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와 동북아 문제에 대한 한국 전직 대통령의 ‘탁견’을 듣고 싶어하는 일본기자들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독재자’라는 독설을 되풀이 하면서 김포공항 페인트 세례사건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히도쯔바시대학 학생들과의 간담회에서는 한국언론을 전공하는 학생에게 “그것 전공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한국언론은 아부만 한다”고 답변했다가 이 학생이 “그것은 87년 민주화선언 이전 상황이 아니냐”고 되묻자 “한국에서는 위에서 언론사 사장과 국장을 다 임명한다”고 주장했다. 또 7일 기자회견에서는 “카터와 부시가 외국에서 국내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나를 비판하는 언론이 있는데 그거 미친 놈”이라고 막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폭언’보다 수행기자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수행취재의 목적 자체가 김 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을 전달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규슈국제대학에서 모든 일본기자들이 국제문제에 대해 질문할 때 수행기자들은 한결같이 내각제 개헌과 향후 정치적 행보 등 국내정치 문제에 질문의 포커스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규슈국제대학은 ‘21세기 아시아를 말한다’는 제하의 심포지움에 김 전 대통령을 연사로 초청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나 수행기자들은 19세기식 정치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언론들 역시 김 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들을 전혀 정제하지 않은 채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기자란 가치판단 이전에 우선 사실을 보도해야 하는 의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국내정치 문제를 묻고 답하는 김 전 대통령과 수행기자들을 바라보는 대학 관계자들과 현지 기자들의 얼떨떨한 표정은 지금도 납덩이처럼 가슴을 누르고 있다.
박 민 문화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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