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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명 매일경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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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22일, 도쿄 인근 나리타 공항에서 한국인 승객 139명이 12시간 동안이나 농성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폭설로 인해 항공기가 결항되자 항공사인 JAL에 항의한 것이다. 국제공항에서 보기 드문 모습인지라 일본은 물론이고 전세계 언론에 상황이 보도됐다. 당시 승객은 모두 320여명이라는데 유독 한국인 승객 139명만 농성에 나서 화제가 됐다.
외국의 국제공항이라 얘깃거리가 됐겠지만, 국내에서 항공기 결항이나 지연에 대한 항의소동은 지금도 여전하다. 폭우나 폭설로, 강한 바람이나 짙은 안개로 항공기가 뜰 수 없는 상황인데도 왜 비행기를 안 띄우느냐고 고함을 지른다. 60년대부터 안전을 무시하고 고속성장에 매진해 온 ‘빨리빨리’ 근성은 지금도 여전한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이번에 진도 해역에서 사고가 난 세월호 운임은 7만원 정도였다. 인천에서 제주까지 13~15시간을 운항하는 뱃삯이 그렇다. 속초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6시간을 운항하는 여객선 운임은 객실 등급에 따라 편도 18만~45만원이다.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 3시간30분간 운항하는 쾌속선 운임은 16만원이다.
국내에서 운항하는 연안여객과 해외로 나가는 국제여객의 가격 차이가 상당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국제여객선의 높은 가격에는 안전에 대한 비용이 포함돼 있다. 해양경찰이 국내 규정에 따라 안전점검을 하는 연안여객선과 달리 국제여객선은 해운항만청이 국제기준에 따라 점검하고 있다. 이 기준은 IMO(국제해사기구)가 정한 것인데 IMO는 국제민간항공기구의 하나로 항공기 안전관리 수준의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어찌보면 국제여객은 안전을 강제하면서 높은 비용이 불가피해졌고 연안여객은 싼 운임을 선택하면서 안전을 포기한 셈이다.
조금 더 빨리 가기 위해 규정속도를 위반해가며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한국의 운전자들, 차량 가격 좀 아끼겠다고 옵션에서 에어백부터 제외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세월호 사고는 그렇게 잉태됐다.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들어야 하고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해 안전을 포기했다. 그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이제 와서 세월호 사고에 대해 어느 누구의 탓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가슴만 치고 있는지 모른다.
안전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의지와 자세가 갖춰지지 않으면 제2, 제3의 세월호는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연안여객과 바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금융시장도 마찬가지다.
국내 금융시장에서 고질적으로 터지는 사건이 있다. 안전을 포기하고 싼 가격을 택한 사례들이다. 저축은행 사태가 그렇고, 최근의 동양사태가 그렇다. 물론 저축은행과 동양그룹 대주주의 도덕성이 불을 지폈다. 세월호 참사의 발단은 청해진해운이고 선장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특정 금융회사가 다른 곳과 비교할 때 터무니없이 더 많은 이자를 얹어준다고 할 때는 당연히 투자 위험이 따른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뱃삯이 얼토당토않게 싸다면 안전에 대한 의심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투자자들은 금융감독원을 믿었고 승객들은 해경을 믿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안전보다 고금리 또는 저렴한 가격의 유혹에 끌리지 않았는지 냉정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보이스피싱, 스미싱, 파밍, 큐싱…. 인터넷뱅킹 모바일뱅킹이 보편화되면서 국내 금융시장에 독버섯처럼 생겨난 범죄들이다. 이름도 가지가지라 다 열거하기도 어렵다.
은행에 가지 않고 컴퓨터 앞에서 뚝딱, 버스타고 이동하면서 스마트폰으로 뚝딱. 그렇게 ‘빨리빨리’ 금융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안전을 뒷전으로 밀어낸 탓에 생긴 문제들이 아닌지 되짚어봐야 할 때다. 은행, 카드사, 보험사, 증권사는 물론이고 금융소비자도 마찬가지다.
한국처럼 송금과 이체를 스마트폰으로 쉽게 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인터넷뱅킹이나 모바일뱅킹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동안 좀 더 손쉽게 주식을 사고, 좀더 빨리 송금을 하기 위해서 안전에 관한 조치를 소홀히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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