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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수웅 조선일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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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상반기에만 한국계 미국 작가 이창래(48)씨에 대한 인터뷰를 두 번 메인 기사로 실었다. 한 번은 이메일 인터뷰였고 또 한 번은 대면 인터뷰였는데,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잖아도 점점 영토가 줄어드는 신문의 문학 지면을 생각하면 예외적 편애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난 3월에는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의 월 독회 검토 대상작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한국 출신 작가이기는 하지만 영어로 쓴 작품을 동인문학상이 검토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까닭은 단순하다. 한국 독자들이 그를 좀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고, 우리나라 다른 작가들에게도 긍정적 자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유감이지만 문화예술에서 기계적 평등은 늘 후순위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이창래 소설을 열거하면, ‘네이티브 스피커’ ‘제스처 라이프’ ‘가족’ ‘생존자’ 4권이다. 최근 장편 ‘On Such A Full Sea’를 막 탈고했다니, 곧 다섯 번째 작품도 번역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창래에게는 한국의 대중이 좋아할 문학 외적 매력포인트가 많다. 예일대 영문과 출신에 명문 프린스턴대 교수, 월가 애널리스트로 활약하다 소설가로 방향전환한 희귀한 경력, 여기에 한국계라는 민족적 특수성까지. 하지만 이 작가를 편애하고 추천하는 이유는 지금 열거한 그런 세속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문학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는 결국 이야기와 문체, 그리고 이를 통한 성찰일 것이다. 이창래 문학은 이 세 핵심 요소가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다. 아름다운 시적 문장과 다음 장을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만도 매혹적인데, 그는 늘 인간과 삶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예리하게 질문하고 성찰해 왔다. 한국계 미국인을 소재로 했지만 현대인의 주변성에 대한 문제(네이티브 스피커), 종군 위안부와 정체성의 혼란(제스처 라이프), 6·25라는 비극을 통해 보는 삶의 희망의 문제(생존자)….
많은 사람들이 현단계 한국문학에서 문체의 편식을 이야기한다. 문장의 아름다움이야말로 한국 본격 문학의 매력이지만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치우치다보니 이야기와 문체사이, 혹은 문체와 사유 사이의 불균형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실제 사회 경험이 부족한 젊은 작가들이 많아지면서 내면과 자의식 위주의 작품이 양산된 결과라는 지적들이 많다. 지나치게 사소화되어가고 있는 한국문학에서 이 재미교포 작가가 한 자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대목이 있다. 노벨상 이야기다. 빼어난 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 동안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이창래는 한국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노벨 문학상은 작가를 망친다. 상 받은 뒤 좋은 작품 쓴 작가 보았는가? 상은 기껏해야 보너스지 목표가 아니다. 모든 작가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쓴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아직 한 번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하지 못한 국가의 콤플렉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건, 혹은 이창래씨가 노벨문학상을 받건, 그 수상은 작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 아닐까.
200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 작가 나이폴은 수상 통보를 듣고 “매우 놀랐다. 나는 나 자신 이외에 어느 것도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멋진 소감을 말한 적이 있다. 노벨상 때문에 한 작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문화는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고 향유하는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도 이제 그런 정도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은 됐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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