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민족통일대축전 참가단의 ‘돌출행동’을 계기로 남남갈등, 이념대립 문제가 언론의 화두로 등장했다. 그러나 언론은 이런 갈등과 대립이 국론분열을 야기할 지 모른다고 우려하면서 그 책임의 화살을 주로는 방북단 ‘돌출행동’의 주역으로 각인된 진보운동 단체들에게 돌렸다.
사실 이같은 언론의 진보진영에 대한 곱지 않은 시각은 비단 평양 민족통일대축전에서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통일연대는 물론이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등 ‘진보’를 표방하고 있는 정당, 사회단체들은 일상에선 철저히 언론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가 통일행사나 노동계 파업, 학생 시위 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때만 ‘문제아’로 집중 포화를 맞아왔다. 진보진영이 어떻게 언론에 투영돼 왔고 그 굴절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최근 사례를 통해 알아봤다.
민노당 기사 한달 6건이 고작
“언론들은 진보정치를 왜곡하지 않는다. 왜냐면 아예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한 관계자는 최근 한 신문 기고에서 진보 진영에 대한 언론의 홀대를 이렇게 꼬집었다.
언론의 무관심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다른 기자한테 물어보면 안될까요. 당사에도 한번 안가봐서 뭐라 말하기가 좀…”, “정말 죄송합니다. 민주노동당 출입기자이긴 한데 제가 솔직히 민주노동당에 대해 잘 몰라서요.”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진보정치’가 최근 기자를 주제로 한 특집기사 가운데 ‘출입기자들이 바라본 민주노동당’이란 꼭지의 도입부이다. 민주노동당은 담당 출입기자들이 ‘안 가봐도’, ‘잘 몰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그저 그런 군소정당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 언론연구원 종합뉴스데이터서비스(KINDS)에서 ‘민주노동당’이란 단어로 10개 중앙일간지 기사를 검색했을 때 8월 한달 동안 고작 69건이 실렸다. 이는 ‘민국당’으로 검색된 기사 137건의 절반에 불과하며, 이 가운데서도 실제 민주노동당의 활동이나 사업만을 독자적으로 다룬 기사는 6건에 그쳤다. 나머지는 대부분 이번 평양 통일행사에 참가한 ‘문제 단체’의 이름으로 인용된 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민주노동당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26일 구 청년진보당이 당명을 사회당으로 개정했을 때 대부분 언론은 이를 단신 처리했다. 사설 등으로 사회당 ‘창당’의 의미를 짚어본 곳은 세계일보 단 하나 뿐이었다.
정권 획득을 목표로 한다는 정당에대한 태도가 이 정도이고 보면 다른 진보적 성향의 부문 대중단체들에 대한 언론보도의 실정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종철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은 언론의 무관심에 대해 “분명히 다양한 사회적 흐름과 세력 가운데 한 축을 이루는 진보진영을 다루지 않은 것은, 현재의 힘이나 영향력 면에서 보도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정적 이미지로 가득차
물론, 진보 진영이 언론의 조명을 전혀 못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영상은 이번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파문에서 보듯, 부정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진보진영은 주로 논란거리나 사회적 물의를 빚는 대상으로 치부된다.
대표적인 게 바로 노동계의 파업이다. 경제난을 이유로 노동계의 임금인상 투쟁을 문제삼아 온 언론의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올해는 특히 지난 6월 봄 가뭄이 극심해지자 언론은 또 이를 근거로 대한항공조종사 노조 등을 겨냥해 “이 가뭄에 무슨 파업이냐”고 맹공을 퍼부었다.
손낙구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은 “평소에는 잠잠하다가 1년에 한번 정도 자본의 필요성이 급박할 시점, 즉 노조 파업이 집중될 시점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며 “파업은 범죄이고, 노동자와 민주노총은 범죄예비집단처럼 다뤄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부 언론은 노동계를 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인상마저 든다”고 덧붙였다.
최근 줄다리기가 한창인 주 5일 근무제 도입과 관련, 이미 ‘시기상조론’을 제기해 온 언론은 지난달 6일 대한상의가 제공한 “현 휴가제도를 유지한 채 주 5일근무제를 도입하면 총 휴일수가 많게는 175일에 이른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베껴 쓰면서 노동계의 반론을 대부분 외면한데서 보듯, 사용자쪽에 기울어 있는 게 사실이다.
진보 역사 몰이해도 문제
그럼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김종철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은 언론의 보수성과 함께 ‘출입처 제도’의 문제를 들었다. 그는 “진보는 기본적으로 현재의 권력관계나 사회질서 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저항하는 세력이다. 그런데 현재 기자들은 정부 부처나 기업 등 이른바 기존 사회질서의 권력집단을 출입처로 두고 정보를 얻는 데 주력하고 있다. 언론이 이른바 밑바닥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사회적 약자의 문제에 둔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출입처 문제에 대해선 노동계의시각도 비슷했다. 손낙구 민주노총 교선실장은 “노동부 기자실에서 한국 노동문제를 취재하다보면 정부쪽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노동부 기자들 보다 현장을 취재하는 경찰기자들이 사실관계에 더 충실한 사례가 많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언론과 기자들의 진보단체의 역사성에 대한 ‘몰이해’도 지적된다. 이번 평양 민족통일대축전과 관련한 언론 보도 논란도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단순히 ‘돌출행동’을 과장하고 확대한 ‘돌출 보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언론의 진보적 통일운동단체를 대하는 시각과 태도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통일연대의 정대연 부대변인은 “어떤 기자가 진보적 통일운동 단체들의 입장이나 활동 방향에 대해 깊이 있게 취재 보도하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는 지 의문”이라며 “과거 군사독재시절부터 금기시돼 온 평화통일이나 주한미군 철수 문제들을 제기하고 공론화해 온 진보적 통일운동 단체들의 입장에 동의하느냐 여부를 떠나 역사성 자체를 무시하고 선정적인 측면만 부각시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무오류의 오만’ 벗어나야
결국 이런 지적과 문제제기는 고스란히 언론과 기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광이 전국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회 간사는 “진보진영의 움직임을 다양한 의견 표출과정의 하나로 보지 않고 무조건 불온시하는, 군사정권 시절부터 지속돼 온 구시대적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자들 자신이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많은 분야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문제도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신문사 편집기자는 “언론이 권력화되고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해지면서 사회의 다양한 의견들과 활동을 있는 그대로 보려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며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려는 ‘무오류의 오만’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 경제부처를 출입하는 한 기자는 “진보세력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어떤 형태로든 이끌어 온 한 축이라는 응당한 평가를 의도적으로 외면해 온 게 언론의 태도였다”며 “선진 유럽국가들에서 보듯, 우리 사회가 더욱 다변화될수록, 또 통일환경이 무르익어 갈수록 이들 진보진영의 사회적 영향력이 점증할 것임을 감안하면 이제 언론도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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