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혁 포기의 데자뷰
[스페셜리스트│경제] 곽정수 한겨레 선임기자·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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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정수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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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직후 캠프의 핵심인사들을 불렀다. 노 당시 당선인은 새정부 국정방향과 관련해 “정치·사회개혁을 반드시 하겠다”고 천명했다. 당시 자리를 같이한 인사는 “순간 경제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결국 경제개혁을 주장한 인사들은 대부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배제됐다. 또 노 대통령은 얼마 뒤 “권력은 시장에게 넘어갔다”며 경제개혁 포기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13년 2월21일 박근혜 대통령직인수위는 5대 국정목표를 발표하면서 대선에서 국민행복을 위한 3대 핵심과제로 꼽았던 경제민주화를 빼버렸다. 인수위는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국정과제 추진계획에 경제민주화가 다 포함됐다. 공약은 꼭 지킬 것이다”고 해명했다.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를 주도했던 김종인 전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이에 대해 “향후 공정위원장 인사를 보면 대통령의 의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3월14일 한만수 이화여대 교수를 공정위원장 후보로 지명했다. 공정거래 분야의 비전문성, 김앤장 등 대형 로펌에서 23년간 근무한 전력이 문제로 지적됐다. 공정위는 ‘경제검찰’로서 시장경제에서 반칙을 하는 대기업을 조사하는 기관이다. 대기업들은 공정위의 제재를 받으면 거의 100% 소송을 제기한다. 이 때 대형 로펌은 대기업들의 단골 변호인이다. 한 후보가 맡은 사건 중에는 재벌의 ‘세금없는 대물림’의 상징과도 같은 삼성 이건희 회장 자녀들에 대한 불법 상속·증여 사건도 있다. 한 후보를 향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꼴’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 후보는 108억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불법이나 투기가 없었다면 재산이 많다는 게 흠은 아니다. 하지만 거액의 재산이 공정위나 국세청에 맞서 재벌의 이익을 대변해 준 대가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더욱이 ‘시장경제의 파수꾼’으로서 서민·중소기업·소비자 등 경제적 약자를 위해 공정한 시장질서를 확립하는 역할을 하는 공정위 수장으로는 더욱 부적절하다.
한 후보는 대형 로펌을 그만둔 지 8년이나 지난 만큼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 후보는 재벌이나 대형 로펌과의 유착 위험성에서 정말 자유로울까?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한 후보의 아들은 세무사로, 지난해 김앤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결국 한 후보 부자는 2대에 걸쳐 김앤장과 깊은 인연을 맺은 셈이다. 고위 공직자가 퇴직 후 대형 로펌으로 옮겨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잘못이라면, 대형 로펌 출신이 공직자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할 위험성도 피하는 게 순리다.
공정위는 박근혜 대통령이 약속한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의 핵심부처다.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하도급거래 제재, 일감 몰아주기 등 재벌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규제 등 핵심과제들이 모두 공정위 소관이다. 공정위 직원들은 대선 이후 오랜만에 제대로 일할 수 있게 됐다고 큰 의욕을 보여왔다. 하지만 인수위원회의 국정목표 발표와 공정위원장 지명으로 어깨가 완전히 처져버렸다.
야당은 물론 시민단체들은 능력 미달인 현오석 경제부총리 후보와 자질 미달인 김병관 국방장관 후보와 함께 현 후보의 지명 철회를 촉구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묵묵부답이다. 박 대통령의 오판과 오기는 결국 스스로를 옥죄는 결과를 낳을 위험성이 높다.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개혁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친 대기업’으로 방향을 잘못잡았다. 박 대통령은 국민행복을 위해 경제민주화를 공약했다. 그를 찍지 않은 유권자들도 이 약속만은 지켜지기를 바랄 것이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지금껏 원칙과 신뢰의 정치를 내세워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노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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