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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헌 한국경제신문 영상정보부장(오른쪽)과 정동수 전자신문 사진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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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영상정보부장·전자신문 사진부장으로 활약형제의 아버지는 사진을 좋아했다. 1960년대 초 일본에서 구해온 니콘 카메라로 그들을 찍어주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아버지는 기념사진 같은 건 잘 찍지 않았다. 대신 백열등 아래 두 손을 모으고 노래를 부르는 큰아들의 모습, 밥상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막내아들의 모습 같은 잔잔한 일상을 사진에 담았다. 나중에 꺼내보니 그 시절이 생각나는 가슴 뭉클한 사진들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렀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진기를 만져보며 크던 어린 형제는 둘 다 사진기자가 됐다.
정동헌 한국경제신문 영상정보부장과 정동수 전자신문 사진부장의 얘기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형제 사진기자는 몇몇 있었지만, 형제가 모두 데스크가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게 사진기자들의 말이다.
16일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만난 형제는 닮아보였다. 형은 한국경제 공채1기, 동생은 전자신문 공채1기라는 것도 닮았다. 어떻게 형제가 모두 사진기자가 됐는지 궁금했다. 최근 데스크가 된 동생인 정동수 부장이 먼저 답했다.
“중학교 때 집에 암실이 있었어요. 형이 대학 다닐 때 사진 동아리를 했거든요. 아버지도 그랬고 형도 사진에 빠져 있었으니 자연스레 친숙해진 거죠. 그러고 나서 1987년에 형이 사진기자가 됐는데 멋져보였어요. 제겐 로망의 대상이었죠.”
동생은 형이 사진기자가 돼 현장을 뛰는 모습에 가슴이 뛰었고 이내 ‘내 길은 저거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도 사진학과를 택했다. 그 시절 사진에만 매진해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정동헌 부장은 그런 동생을 넌지시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형은 대학 때 화학과를 다녔다.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전공보다는 사진이 좋았다. 그 열정 덕에 한국기자상은 물론 이달의 사진기자상도 수차례 받았다.
“대학시절 야시장에 가면 외국 서적을 모아놓고 파는 책방이 있었어요. 거기에 가면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이야, 이런 세계도 있구나’ 하고 동경하게 됐죠. 사진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예요.”
형제는 동생이 사진기자생활을 시작한 1994년부터 현장에서 자주 만났다. 하지만 악수하고 돌아서서 본격적으로 일에 돌입하면 형제보다는 선의의 경쟁자에 가까웠다.
“현장에서 몸싸움도 많이 했어요”라고 형이 말하자 “포인트는 한 자리, 밀리면 못 찍잖아요”라고 동생이 말했다. 껄껄껄 공감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둘은 성격도, 외모도 조금 다르다. 하지만 인상이며 말소리, 걸음걸이가 비슷해 사람들이 둘을 착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 기자, 왜 저번에 아는 체도 안했소?”라는 한 인사의 말을 곱씹다가 알리바이를 따져보니 형이 아닌 동생인 적도 있었고, 동생은 “좀전에 오셨다가 왜 또 오셨느냐”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다.
정작 닮은 것은 사진. 펜 기자들의 문체처럼 사진기자에게도 개개인마다 독특한 앵글이 있는데 선수들은 형제의 ‘카메라 워크’가 비슷하다는 걸 알아본다는 것이다. 동생은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초년 기자시절에는 형에게 ‘사진을 왜 이렇게 찍었느냐’고 혼도 많이 났다고 한다.
형은 “처음 동생이 사진기자가 됐을 때 맨발로 뛰고 진흙탕에 빠져도 좋은, 멋진 직업을 택했고 좋은 기자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이제 데스크가 되었으니 막연한 관리자 역할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아버지, 어머니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동생은 “대한민국 보도사진 분야에서 보잘것없을지라도 우리 형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보겠다”고 다짐했다.
두 형제는 언제든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아직 현장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했다. 매일 지면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그들이 다시 현장에서 만나는 날이 올까.
형제를 사진기에 담았다. 그들이 볕 좋고 사진이 잘 나올 만한 장소를 물색해 줬다. 봄날, 형제가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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