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해"

루게릭병 투병중인 80년 5월 한국기자협회장 김태홍씨


   
 
   
 
가을 장맛비가 쉼 없이 내리던 지난 10일 서울시 강남구 반포동 한 아파트. 인공호흡기를 단 한 사람이 거실 한쪽에 놓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하자 그는 눈을 통해서 반가움을 표현했다. 1980년 초 한국기자협회장을 지낸 김태홍 전 의원이었다. 그는 지난해 11월 루게릭병 확진 판정을 받았다. 루게릭병은 전신의 근육이 조금씩 마비되는 희귀병. 근육이 마비돼 꼼짝을 못하기 때문에 24시간 간병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침대의 머리 부분을 살짝 올려주자 상체를 일으켰다. 휠체어에 앉고 싶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그의 몸을 들어 올려 휠체어에 앉혔다. 얼굴만 제외한 그의 육신은 정신이 지배할 수 없는 상태인 듯 보였다. 그러나 묻는 말에 막힘없이 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80년 역사의 현장에 서 있던 결연한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중간 중간 숨이 가쁜 듯 잠시 쉬었지만 대화는 이어갔다. 80년 초 당시 기자협회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80년 당시 언론계는 어땠나요.
“기자들은 다 죽어 있었지. 박정희 정권 20년 동안 전부 순치된 거야. 기자들은 양처럼 돼 있었어.”

-저항하는 기자들은 없었나요.
“1975년 자유언론을 부르짖다가 해직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투),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투) 선배들이 있었지. 비공개로 활동을 해온 합동통신, 경향신문, 중앙매스컴, 한국일보 등에 다니는 젊은 기자들도 있었고….”

-기자협회장에 출마한 이유는.
“당시 기자협회 활동은 유명무실했지. 회장은 매년 주요 언론사 차장급들이 모여 내정했어. 그 사람들 대부분 정부에 순응하는 사람들이었지. 젊은 기자들이 뜻을 모았어. ‘기자협회 민주화’를 위해 나서자고. 동투, 조투 복직문제도 추진하기로 했지. 합동, 경향, 중앙, 한국 등 4개사 기자 10명 안팎의 기자들이 동참했어.”

10·26 이후 기자협회 분회 활동에 적극적이던 경향·중앙·한국·합동통신 기자들은 사전 모임을 통해 회장 선거에 단일 후보를 내세우기로 합의하고 중앙매스컴에서 후보를 내기로 했으나 경영진의 반대에 부딪쳤다. 논의 끝에 합동통신 김태홍 기자가 후보로 결정됐고, 80년 3월31일 열린 기협 제17차 대의원대회에서 김태홍은 만장일치로 제20대 회장에 선출됐다.

-출근 첫날 기자협회 사무실 문에 ‘기관원 출입금지’라고 써붙였다면서요.
“당시 기자협회 사무실에는 보안사 2명, 중앙정보부 2명, 치안본부 1명, 시경 1명, 남대문서 1명 등 7명이 출입했지. 오전 10시가 되면 회장실 원탁에 앉아 있었어. 자기네가 임자였어. 출입을 금지하자 기관원들은 기자협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지.”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기자의 밤’을 만들었어. 매주 월요일 밤에 신문회관 지하 레스토랑을 빌려 언론계 선후배들이 모여 시국과 언론에 대해 논했지. 이영희 선생, 송건호 선생, 천관우 선생 등 이런 분들도 오셨어. 동투, 조투, 현역기자 등 1백여 명이 매주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어. 영국제 수동식 인쇄기를 사들여 주요 시국 현안에 대해 성명서를 하루에 3~4건씩 찍었어. 기자협회가 발표한 성명서는 AP, 로이터, UPI 등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전파됐어. 전두환이는 미치려고 그랬지.”

-신군부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셨겠네요.
“미운털 정도가 아니라 딱 죽여 버리고 싶어했어. 회장을 시원찮은 사람이 맡았으면 그런 걸 못했을 거야. 살벌한 때였어. 나는 죽을 각오를 했어. 여기서 죽자. 그때 내 나이가 아마 39살이었을 거야.”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나요.
“용기 정도가 아냐. 목숨과 맞바꾸는 것이지. 5월15일 서울역에서 10만이 넘는 데모 군중을 봤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것은 60년 4·19혁명 이후 20년 만이었어. 내가 사학을 전공했어. 학교 다닐 때 현대사 10년은 중세 5백년하고 역사 발전속도가 같다고 배웠어. 중세로 따지면 우리는 1천년간 암흑시대를 겪었어. 그런데 기회가 온 거야. 놓칠 수 없었지. 내가 계산해보니 학생, 시민, 정치인들이 한꺼번에 일어서면 15% 정도의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한다. 나는 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

-기협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죠.
“기자협회 사건하고 신군부 움직임이 맞물려 들어갔지. 기자협회를 가만두면 큰일 나거든. 당시 우리는 5월20일 자정을 기해 제작 거부 등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한 상태였어. 신군부는 큰 위협을 느꼈을 거야.”

-1백일간 도피생활을 하셨죠.
“말이 도피지. 매순간 죽기 아니면 살기였어. 계엄당국은 나를 잡기 위해 광주일고 동기들 3백60명의 집을 새벽 4시에 동시에 덮치기도 했어.”

-곧 잡힐 거라는 불안감이 늘 있었죠.
“물론이지. 내가 몸이 아픈 것이 당시 일과 무관하지 않아.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어. 장기간에 걸쳐 도피생활을 하면서 엄청난 공포가 지배했어. 그것이 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지.”

-체포된 후 남영동에서 한 달 이상 조사를 받으셨던데요.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을 만났어. 보름간 아침부터 새벽 4시까지 조사를 받았어. 말이 조사지 주로 맞는 게 일이었지. 그는 김대중의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조작해 놓고 자백하라고 다그쳤어.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을 했지.”

-후배들에게 한 말씀해 주시죠.
“언론자유는 어떤 자유보다 소중한 자유야.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지. 그걸 명심하고 하루하루 살았으면 좋겠어.” 김성후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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