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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6으로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자 언론계에서는 평기자 중심으로 검열 철폐와 자유언론 실천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봇물 쏟아지듯 일어났다. 사진은 1980년 5월 한국일보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검열 철폐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모습. (한국일보 40년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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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 반대 구심점 기협, 신군부 집권 방해세력 낙인찍혀
5·17 직후 체포·구속…김태홍·노향기·김동선 등 옥고1980년 5월17일 한국기자협회는 비상대기 상태였다. 전날 서울시 중구 태평로 신문회관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협회 회장단, 운영위원, 분회장, 보도자유분과위원 연석회의에서 5월20일 자정부터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거부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제작거부에 들어간다고 결의한 탓이었다. 비상근무 중이던 기자협회장 김태홍, 기자협회보 편집실장 김동선, 사무국 부국장 김영성 등은 외부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부터 심상치 않은 소식들이 속속 들어왔다. 경찰이 이화여대에서 시국 대응방안을 논의하던 전국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을 급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이어 부회장인 노향기 한국일보 기자로부터 계엄당국이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김태홍의 광주일고 후배라는 점을 이용해 김태홍을 학생운동의 배후인물로 연결시키려는 계략을 꾸미려 한다는 첩보가 들려왔다.
대책을 논의한 끝에 김태홍은 피신하기로 했다. 김태홍과 기자협회보 기자 안양로는 이날 오후 7시쯤 택시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안양로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시절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경력이 있었다. 이날 자정을 기해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씨와 문익환 목사 등 수많은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대거 검거했다.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1980년 서울, 그 가짜의 봄1979년 12월12일 쿠데타를 일으킨 후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신군부는 집권 음모를 속속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사회 각계의 비등한 민주화 여론을 무시하고 계엄당국은 4월 중순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했다. 막강한 권력을 움켜쥔 전두환은 실세로 부상했고, 집권을 위해 숨가쁘게 움직였다. 그 첫 번째 카드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였다. 신군부는 5·17 쿠데타로 행정부와 국회 등을 무력화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면서 권력 찬탈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기협 부회장인 정교용(중앙일보), 고영재(경향신문), 이수언(부산일보), 이홍기(KBS)와 감사 박정삼(한국일보), 기자협회보 편집실장 김동선 등 6명은 5월17일 당일 연행됐고, 다음날에는 안양로가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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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서울의 봄은 국민들의 기대와 달리 신군부의 정권 찬탈로 물거품이 됐다. 80년 5월14일 서울시청 앞에 운집해 군부퇴진, 계엄 해제, 민주화를 요구하며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기자협회 삼십년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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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자막에는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이때 우리집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신분증을 보인 4명은 집으로 들어와 가택수색부터 시작했다. 그들은 책장을 샅샅이 뒤져 내가 쓰다 만 원고 뭉치와 ‘창작과 비평’ 같은 책을 챙겼다…. 층계를 내려오면서 한 친구가 권총을 보이며 ‘우리는 도망 가면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협박했다.” 김동선은 89년 가을에 발간된 기자협회 계간지 ‘저널리즘’에 당시 연행 사실을 이렇게 밝혔다.
노향기는 도피 42일 만에 성북경찰서에 자수했다. 노향기는 은신처가 기관원들에게 발각돼 오도 가도 못하자 자수를 선택했다. 체포령을 피해 용케 피신한 김태홍은 독립문 네거리 부근에 있는 후배 집에서 50일 정도 숨어 지냈다. 어느날 수사관들의 급습을 피해 달아난 그는 이집 저집을 돌면서 하룻밤을 의지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남행했다. 전남 강진에 있는 친구의 농장에 숨어 있던 그는 8월27일 한낮에 수사관들에게 체포됐다. 도피한 지 100일 만에 붙잡힌 김태홍은 그 유명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
79년 10월26일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자 세상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들떴다. 비상계엄 상태였지만 정치·사회·문화 전반은 유신체제 하에서 억눌려 왔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언론계는 언론자유의 신장을 요구했다. 80년 2월20일 경향신문, 3월5일 한국일보 기자들은 각각 “동아·조선투위 기자들이 예외 없이 전원 복직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고, 3월19일에는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들이 ‘언론검열 철폐와 자유언론실천’을 주장하는 결의문을 채택했으며 같은 날 편집인협회는 계엄 해제와 검열 폐지 등을 요구하는 3개항의 결의문을 냈다.
탁경명 폭행사건, 검열 철폐 도화선4월에 접어들면서 신군부가 신문을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엄격한 규제와 주문들이 언론에 족쇄를 채우기 시작했다. 검열단의 주문사항은 △보도관제 △보류 △선별처리 △보도 등으로 구분됐는데, 그 가운데 보도는 △불가피하게 사실보도를 해야 할 경우 6하원칙에 따라 짤막하게 내비칠 것 △…부분은 부각시킬 것 △…부분은 축소할 것 △특정사항은 확대 보도할 것 등으로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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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5·17 쿠데타로 기자협회 간부들이 대거 구속된 뒤 ‘발행실적 미달’을 이유로 폐간됐던 ‘기자협회보’는 81년 7월10일 1년2개월 만에 복간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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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편집권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하고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의 언론 묵살, 도발행위가 빈번해지면서 일선 기자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사북항쟁이 터졌다.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리던 동원탄좌 노동자들이 어용노조를 반대하며 임금인상투쟁을 벌이자 신군부는 이를 폭력으로 저지했고, 이 과정에서 현장을 취재하던 중앙일보 강원도 정선 주재기자 탁경명이 군인의 M16 개머리판에 얻어맞아 중상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언론검열 철폐운동에 불을 붙였다. 중앙일보는 5월 7일자 7면에 탁 기자에 대한 폭행사실 및 기자협회가 계엄사령관에게 항의한 사실 등을 보도하려 했으나 계엄사의 검열과정에서 삭제됐다. 이에 중앙일보 기자들은 삭제된 부분을 공백으로 남겨둔 채 인쇄하기로 결정하며 검열에 항의했다. 2판부터는 1단으로나마 폭행사실을 보도했다. 또 2백여 명의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기자총회를 탁 기자 집단구타 사건에 대한 항의문과 함께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결의했다.
다음날에는 합동통신·CBS·국제신문 기자들이 언론검열을 철폐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5월10일에는 경향신문, 동아방송,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들이, 12일에는 한국일보, 현대경제일보 기자들이 13일에는 MBC 기자들이 검열철폐를 결의했다. 평기자 중심으로 검열 철폐와 자유언론의 실천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기자협회는 이런 움직임을 결집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기협은 5월16일 오후 2시 신문회관 회의실에서 기자협회 회장단, 운영위원, 분회장, 보도자유분과위원 연석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기협 활동 중단·기자협회보 폐간이날 회의에는 동아·조선투위 위원들도 참여했다. 결론은 부당한 보도검열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으로 도출됐지만 실천방안을 놓고 논란이 계속됐다. 검열을 전면거부하자는 강경론과 계엄사령관에게 시정을 요구해서 풀어가자는 온건론이 맞서면서 오전에 시작된 회의는 오후 4시까지 이어졌다. 격론 끝에 ‘모든 기자들은 검열 철폐를 위해 극한 투쟁을 불사한다’, ‘검열지침을 무시한다’는 행동지침으로 5월20일 자정부터 검열 거부를 이행하고 당국이 강압적으로 나올 경우 제작거부에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기협의 검열거부 및 제작거부 결의는 정권 장악을 기도하던 신군부에 충격을 주었다. 기협을 출입하던 보안사 요원은 “모든 게 끝났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협박은 곧장 기자협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이어졌다. 5·17 이후 김태홍 등 기협 관련인사 9명은 강제연행됐고 대부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받고 구속됐다.
김태홍·노향기·박정삼·김동선·안양로는 실형을 선고받고 1년여씩 복역했으며 고영재는 경향신문 사건으로 이첩됐다가 81년 5월 석방됐다. 이수언 등 나머지 사람들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들이 체포 구속됨에 따라 기자협회는 조직 자체가 와해됐고, 10·26 이후 태동한 언론자유운동 추구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말았다. 기협 활동이 전면 중지된 가운데 그해 7월31일 기자협회보는 ‘발행실적 미달’을 이유로 폐간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리고 5공화국 기간 동안 기자협회는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로 존속하게 됐다. 김태홍은 “기자협회 사건은 일선기자들의 구심점인 기자협회의 언론자유수호 운동을 봉쇄해 정권을 탈취하려는 신군부세력의 음모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기자협회 삼십년사(한국기자협회)
△작은 만족이 아름답다(김태홍 지음, 인동)
△저널리즘 89년 가을호(한국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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