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권력자들보다 똑똑...국민의 입 틀어막을 수 없어"

보도지침 폭로 주역 김주언 언론광장 감사



   
 
   
 
86년 정부 보도지침 자료를 폭로할 당시 김주언 기자의 나이는 서른 하나였다. 돌도 안 지난 첫딸은 막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다. 그가 양심선언에 썼던 ‘내 작은 가정이 소시민적 틀을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보도지침 사건은 권력의 언론통제 실상과 제도언론의 가면을 여지없이 벗겼다. 그리고 그의 운명도 바꿔 놨다. 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87년 한국일보에 복귀해 노조 결성을 주도했고 92~93년에는 한국기자협회장을 지냈다. 이후 ‘언론개혁시민연대’를 창립하는 등 언론운동가의 길을 걷게 됐다. ‘언론광장’ 감사로 일하고 있는 그를 6일과 10일 만났다.


-후회하지 않나요.
“(웃으면서) 뭘 후회하죠?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에요.”

-보도지침을 폭로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새벽 2~3시에 편집부 야근을 끝내고 아무도 모르게 복사했어요. 외부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그렇게 안했겠죠. 마음의 부채도 있었어요.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민통련 등 재야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많았죠.”

김주언은 서울대 문리대 재학시절 김석희(번역가), 김정환(시인), 황지우(시인), 김도연(작고) 등과 문학회 활동을 했고 문리대 계간지 ‘형성’ 편집위원을 했다. 74년 민청학련사건 관련 유인물 살포로 구속됐다가 검찰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79년에는 YWCA 위장결혼식에 참석해 구류도 살았다.

-‘말’지와 인연이 깊었나요.
“창간 전부터 민언협 사람들과 자주 만났어요. 창간 편집장이던 김도연이 친구였거든요. 김도연은 신문이 싣지 않은 기사를 ‘말’지에 보도하고 싶어 했죠. 내가 매달 한 두 꼭지씩 그런 기사들을 익명으로 기고했어요. ‘말’지가 나오면 신문사 기자들한테 팔기도 했어요.”

-보도지침 자료를 누가 건넸는지 아무도 몰랐죠.
“신문사 후배한테 보도지침을 폭로한 간 큰 기자가 누구냐고 묻기도 했어요. 위장인 셈이죠. 문리대 선배이자 재야 출신으로 명망이 있던 이철 국회의원과 상의해, 현직 기자가 우편으로 보도지침 철을 우송한 것으로 각본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평민당 측의 사정으로 무산됐어요.”

-양심선언을 써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맡긴 것도 그런 이유였죠.
“보도지침 자료를 사제단 앞으로 보내면 사제단이 이를 다시 민언협에 비밀리에 전달하기로 했어요. 사제단의 공개기자회견이 있기 전 명동의 한 다방에서 김태홍 선배, 김정남 선배와 만나 얘기했죠. 명동성당에 들러 양심선언을 작성한 뒤 서대문의 한 성당으로 김승훈 신부를 찾아갔어요.”
민언협은 보도지침 공개를 앞두고 경찰의 눈을 피하면서 동시에 공개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사제단은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김정남은 함세웅, 김승훈 신부와 상의했고, 그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김승훈 신부가 뭐라고 하시던가요.
“신부지만 나도 잡혀갈 수 있다. 잡혀가더라도 당신이 양심선언을 했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보도지침 사건을 폭로할 당시와 비교해 한국 언론현실은 어떤가요.
“보도지침을 내려 시시콜콜하게 통제하지는 않죠. 그러나 비판언론을 제거하고 비판적인 언론인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는 진행되고 있어요. 광고주에게 압력을 넣기도 하죠. 국민은 권력자들보다 똑똑합니다. 아무리 언론을 통제하더라도 모든 국민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어요.” 김성후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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