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주문에 빼고 넣고 키우고 줄여…여론 조작 일상화

기자와 필화 (8) 1986년 '말' 보도지침 폭로



   
 
  ▲ 전두환 정권이 보도지침을 통해 사실상 언론의 제작까지 전담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89년 12월 국회 언론청문회에 참석한 김태홍 당시 한겨레신문 이사, 신홍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주언 서울경제신문 기자(왼쪽부터). 연합뉴스  
 
기사 크기·위치·제목까지 지시…민감사건 ‘절대 불가’
김태홍·신홍범·김주언 등 옥고…9년여 만에 재판 끝나


너댓평 남짓한 취조실 천장에는 촉수 낮은 알전구가 희미한 빛을 내며 대롱거리고 있었다. 취조실은 출입문 이외에는 창문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 맞은편 구석에는 욕조가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알아. 이재문이 이곳에서 수사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 일단 여기 들어오면 순순히 불어서 나가는 길과 죽어서 나가는 길 두 가지 길 밖에 없지.” 그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김주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1986년 12월15일, 한국일보 편집부 기자였던 김주언은 회사로 출근하던 길에 경찰 지프에서 내린 형사들에게 붙잡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 왔다. 밤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심문이 이어졌다. 철하기 쉽도록 양쪽 끝을 접은 16절지 백지에 태어나서 성장하기까지 과정과 보도지침을 입수하게 된 경위, 폭로하게 된 배경 등에 대한 자술서를 쓰고 또 썼다. 모멸감을 주고 협박하고,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먹으로 치고, 혁대를 풀어 때리고,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우연찮게 본 보도지침 사본
80년 5월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언론 장악에 열을 올렸다. 80년 11월 언론통폐합조치를 강행한 데 이어 12월 말에는 언론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시행했다. 이어 문화공보부에 홍보조정실을 설치해 일상적인 언론 통제에 들어갔다.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85년 가을 무렵부터 매일 각 언론사 보도국이나 편집국에 기사 작성과 보도에 관한 세밀한 지침을 시달했다. 이런 보도지침이 언론사에 하달되고 있다는 사실은 공개된 비밀이었지만 실체는 좀처럼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론사가 철저하게 은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들은 86년 4월과 5월에 걸쳐 각 신문사별로 ‘우리의 결의’를 발표하면서 보도지침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기자들은 “기관원 출입과 홍보지침 등 일체의 외부 간섭을 거부한다”(4월18일 한국일보) “언론조정과 협조라는 이름 아래 계속되고 있는 정부기관의 부당한 언론간섭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5월8일 동아일보) “협조요청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고 있는 지배권력에 의한 보도통제와 조작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5월15일 중앙일보)는 결의를 연쇄적으로 내면서 보도지침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혔다.

한국기자협회 한국일보 분회가 ‘우리의 결의’를 낸 뒤 기자들은 기관원이 올 때마다 ‘나가달라’고 요구했고, 보도지침을 눈에 띄는 대로 모아 두기로 했다. 한국일보의 경우 전화를 통하거나 기관원이 직접 편집부국장에게 내용을 전달하면 편집부국장이 이를 모아두었다가 신문제작에 사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근 기자들은 데스크 책상 위에서 이른바 ‘홍보조정’으로 불리는 보도지침 사본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에 불과해서 전체 실상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김주언은 우연한 기회에 편집국 서무 책상에 보도지침이 철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자들의 결의가 있은 얼마 뒤였다. 편집국 서무는 한국일보에 시달된 보도지침을 검정색 표지의 철로 묶어 관리하고 있었는데, 300~400장이 넘었다. 김주언은 서울대 문리대 72학번 동기인 친구 김도연(민주통일민족운동연합 홍보기획실장)에게 보도지침 철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김도연은 이를 빼내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김주언은 보도지침을 복사해 김도연에게 전달했다.

서대문 비밀편집실서 한달간 제작
김도연은 보도지침 복사본을 민통련에 가지고 가 민통련 간부들과 회람한 뒤 매우 중요한 문건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나 민통련에서 폭로하기보다는 해직기자들로 구성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에서 자료를 발간하는 것이 좋다고 결론을 내렸다. 민언협은 84년 12월 동아·조선투위 소속 언론인과 80년 해직언론인들이 모여 창립한 언론운동단체로 85년 6월부터 두 달에 한번꼴로 기관지 ‘말’을 발간하고 있었다. ‘민중 민족 민주언론의 디딤돌’이라는 부제를 달고 창간된 ‘말’은 80년대 후반까지 재야와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읽혔다.

민언협 사무국장 김태홍은 민언협 멤버였던 신홍범 백기범 홍수원 박우정 이석원 등과 논의해 보도지침을 ‘말’ 특집호로 발간하기로 합의했다. 편집은 경향신문 해직기자 출신으로 ‘말’ 편집장이던 홍수원이 전담했다. 홍수원은 86년 7월부터 한달간 민언협의 비밀편집실에서 보도지침 사본과 씨름을 했다. 일종의 비합법 지하언론인 ‘말’은 발행될 때마다 압수수색을 당하고, 편집인이 연행돼 구류를 살아야 했다. 따라서 편집실을 비밀리에 유지했고, 편집장 등 편집진도 누구인지 몰랐다. 비밀편집실은 서대문구 서울시교육청 근처 2층 건물에 있었다. 출판사로 외양을 꾸며놔 건물 주인도 모를 정도였다. 위치를 아는 민언협 간부들도 손에 꼽았다.

홍수원은 20평 남짓한 비밀편집실 한쪽 구석에서 85년 10월에서 86년 8월까지 총 6백88개의 보도지침 항목을 날짜별로 분류하고 그 옆에 해설을 붙였다. 보도지침이 지면에 반영됐는지 여부도 신문과 대조해가며 확인했다. “시시콜콜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거의 매일같이 주요 사건에 대해 ‘보도 절대불가’ ‘불가’ ‘가’의 판정을 내리면서 일일이 지시했어요. 한편으로 철저하다는 생각도 했죠. 보도 내용은 물론이고 사진, 제목, 크기, 위치 등 형식도 정하고 해설기사를 만들어 붙여달라는 주문까지….” 홍수원은 회고했다.



   
 
  ▲ 86년 6월3일 1심 선고공판에서 석방된 보도지침 3인방이 당일 저녁 민언협 간부들과 마포구 공덕동 민언협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영희 선생, 송건호 선생 등의 얼굴이 보인다. 연합뉴스  
 
보도지침은 거의 매일같이 주요 사건에 대해 자의적으로 ‘보도 절대불가’ ‘불가’ ‘가’의 판정을 내리면서 보도기관에 이를 지킬 것을 시달했다. ‘농촌이 파멸 직전’이라는 기사는 절대 불가, ‘개헌특위’ 기사는 ‘개헌’이라는 말을 빼고 ‘특위’라고만 보도할 것, 필리핀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기사는 가급적 작게 보도할 것, 전기·통신·우편요금 인상을 보도할 때는 제목에 몇 퍼센트 올랐다고 하지 말고, 예컨대 10원에서 20원으로 올랐다고 보도할 것, 한·미통상협상기사는 ‘미국의 압력에 의한 굴복’ 대신 ‘우리의 능동적 대처’로 쓸 것 등을 지시했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처럼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사건은 보도지침이 모두 반영됐다. 검찰이 부천서 성고문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던 1986년 7월17일 보도지침은 “기사를 사회면에 싣되 검찰이 발표한 내용만 보도하며,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표현”하라고 지시한다. 지침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공안당국이 배포한 분석자료 중 ‘사건의 성격’ 부분에서 제목(‘혁명 위해 성까지 도구화’)을 뽑아주고,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진영의 고소장이나 NCC(한국교회협의회), 여성단체 등의 사건 관련 성명은 일절 보도하지 말라”고 시달한다.

“보도지침이 지면에 적게 반영됐으면 하는 심정으로 대조작업을 벌였어요. 다 하지는 못했고 중요 기사만 살폈는데, 안보 관련 문제나 정치적 이슈가 된 사건은 100% 다 반영됐더군요. 특히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대조하면서 이럴 수가 있나 했어요. 조·석간 6개 신문 모두 보도지침에 충실하게 보도를 했어요. 심장이 떨리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권력 쪽에서 서슬 푸르게 나온 문제는 꼼짝없이 그쪽 지시대로 움직인 것이죠.” 홍수원은 말했다.

보도지침을 폭로하는 ‘말’ 특집호(부제:보도지침, ‘권력과 언론의 음모’)는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삼원인쇄소에서 비밀리에 인쇄를 끝내고 9월6일 발간돼 대학가와 재야 및 종교단체 등에 배포됐다. 민언협은 ‘말’ 특집호 발간과 함께 9월9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공동으로 명동성당 소강당(사도회관)에서 ‘보도지침 자료공개 기자회견을 하면서…’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민언협 송건호 의장, 조선투위 최장학 위원장, 동아투위 김인한 위원장, 사제단 김승훈, 함세웅, 정호경, 김택암 신부가 참석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보도지침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보도지침이 공개되자 권력당국은 ‘말’ 특집호 발행 및 배포와 관련해 김태홍을 전국에 지명 수배하고, 정보력을 총동원해 보도지침이 어떤 경로로 누출됐는지 내사를 벌였다. ‘폭풍전야’랄까. 민언협은 긴장 속에서 비밀편집실을 유지했고 ‘말’ 발행도 일상적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그해 12월10일 도피 중이던 김태홍이 체포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고, 그의 진술에 따라 12일에는 민언협 실행위원 신홍범이, 15일엔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이 연행돼 구속됐다. 비밀편집실 소재지가 노출되고 편집진 면면이 드러나면서 홍수원, 박우정, 박성득 등도 일제히 도피했다.

“불 낸 사람이 화재신고자 잡은 격”
검찰은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 3명을 구속 기소했다. 구속 사유는 국가보안법상 외교상기밀누설죄와 국가기밀누설죄, 이적표현물 소지죄, 그리고 국가모독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한 종교단체와 국내의 모든 재야단체들이 보도지침 폭로를 지지하고 구속된 언론인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언론인보호위원회, 미국과 캐나다의 언론단체들에서 석방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이 전두환 대통령 등 정부 인사들에게 전달됐다.

다음해인 87년 4월1일부터 보도지침 사건의 재판이 시작됐다. 변호인단은 한승헌 고영구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이상수 조영래 김상철 박원순 신기하 함정호 등으로 구성됐다. 검찰 측은 서울지검 공안부의 안왕선 검사, 재판장은 박태범 판사였다. 재판은 선고공판까지 모두 8차례 열렸는데, 재판이 열린 서울형사지법 103호 법정은 매 재판마다 항상 초만원을 이뤘다. 재판 과정을 줄곧 지켜보았던 뉴욕조선일보 기자 류숙열은 방청기를 통해 “사건 자체가 억지 혐의를 씌운 것이기도 하지만 40대 초반의 검사 한 명과 오랜 세월 법정에서 수많은 인권투쟁을 벌여온 11명의 쟁쟁한 변호사들과의 공방전은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아 검사는 시종일관 논리적인 설명을 내지 못했다”고 썼다.

신홍범은 3차 공판에서 변호인 반대신문을 통해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의 표현을 빌려 한국언론의 절망적 상황을 개탄했다.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던 1백60여 명의 기자들이 언론현장으로부터 추방된 75년 3월이 한국언론의 24시라면, 언론사 통폐합의 이름 아래 6백80여 명의 언론인이 해직되거나 투옥된 80년 여름이야말로 한국언론의 25시요, 보도지침을 폭로했다 하여 재판을 받고 있는 오늘의 시점은 바로 한국 언론의 26시”라고 진술했다. 언론계 원론인 송건호 민언협 의장과 박권상 전 동아일보 논설주간은 증인으로 나와 “보도지침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강제 언론통제지침”이라며 “저들 피고인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6월3일 1심 선고공판은 전원 유죄였다. 김태홍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신홍범은 선고유예, 김주언은 징역 8개월에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1년이었다. 항소심은 공판도 열지 않은 채 세월을 보내다가 94년 7월5일 피고인 세 사람에게 모두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 사이에 국가모독죄와 옥내집회 처벌 조항은 폐지됐다. 이적표현물 소지와 외교상 기밀 누설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 무죄판결은 검사의 상고로 1년6개월이 지난 95년 12월5일에야 상고 기각으로 확정됐다. 9년여에 걸친 보도지침 사건 재판이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변호사 한승헌은 재판 중에 “이 사건은 불을 낸 사람이 화재 신고자를 잡아 신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자료
△보도지침(민주언론운동협의회편, 두레)
△한국의 언론통제(김주언 지음, 리북)
△진실, 광장에 서다(김정남 지음,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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