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指紋)
CBS 유영혁(경제부 차장)
영등포 H은행 지점 4억3000만원 강도사건 수사를 맡은 영등포 경찰서 수사본부는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저녁 흥분에 휩싸였다. 지점 4중 금고의 맨 안쪽문 손잡이에서 선명한 지문 하나를 채취했기 때문이다.
지문을 발견한 시간은 사건발생 24시간 뒤인 3월 19일 밤 9시. 사건이 발생한 뒤 경찰은 외부인은 물론 내부직원들까지 금고의 출입을 통제해주도록 지점장에게 요청해뒀기 때문에 발견된 지문은 범인의 것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경찰은 먼저 금고털이 전과가 있는 전과자들을 대상으로 대조작업을 벌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지문을 발견한 다음날 새벽 5시에 지문의 주인공이 밝혀졌다. 이름 : 강혁. 생년월일 : 1972년 4월 5일. 본적 : 부산. 현주소 :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직업 : 무직. 전과 없음.
경찰은 지문 주인과 지점 직원들의 상관관계를 따지기 시작했다. 72년생인 사람과 본적이 부산인 사람. 직원 중 72년생이 있었다. 입사 2년차인 김모다.
김모는 군에서 제대한 뒤 모 대학 4학년을 마치고 2년 전에 H은행에 입사했다. 지문의 주인공 강혁과는 일단 나이가 같다. 출신대학이나 군 경력이 같다면 공모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 경찰의 판단이다.
N방송의 수습기자 강혁은 실업자 아닌 실업자로 1년을 보냈다. 97년 11월에 입사시험에 합격해 한달 동안 교육까지 받았지만 수습발령은 받지 못했다. 입사시험에 합격한 직후에 IMF 사태가 터졌다. N방송은 감히 신규 채용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구조조정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덕분에 강혁은 불안하고 초조한 1년을 보내고 99년 1월 수습발령을 받았다.
수습발령을 받은 뒤에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수습기자 6명을 다 채용한다는 보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두명 정도는 수습을 마치더라도 공식 발령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들린다.
언제나 불러주나 하고 목이 빠지도록 기다린 끝에 겨우 수습이 됐건만 이제는 동료들끼리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해야 한다. 동료 두 명의 시체를 밟고서야 비로소 안정된 고용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동료가 아니라 1진이다. 시도 때도 없이 1진에게 보고하지만 1진에게 좋은 말 듣기를 기대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보고하는 도중 선배에게서 듣는 말 가운데 욕이절반이다."너는 그것도 모르냐 이 XX야", "너 시험보고 들어온 것 맞냐?", "야 X팔 다른 데는 벌써 뉴스 나가는 데 너는 뭐하냐?"…. 더러는 모멸감을 느껴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머리 꼭대기까지 끌어올라 오지만 IMF시절에 더러운 자리 하나 보전하는 것이 얼마나 출세한 것인데, 감히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동료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보다 더 현실적이고 절박한 요구인 1진에게 깨지지 않기 위해 강혁은 특기를 하나 터득했다. 바로 남의 것 훔쳐보기다. 타사 기자가 취재한 수첩 훔쳐보기, 타사 기자가 쓰고 있는 기사 훔쳐보기, 경찰이 책상에 몰래 감춰둔 조서나 전통 훔쳐보기 등등.
사건발생 사흘째 아침, 1진에게 보고할 거리를 찾기 위해 영등포 수사본부에 들렀던 강혁은 그날도 유감없이 특기를 발휘해 경찰의 수사기록을 훔쳐보면서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다. 유력한 용의자의 이름이 자기 이름과 똑같다.
'이놈의 세상 이렇게 좁을 수가 있나.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용의자의 이름이 하필 내 이름과 똑같을 게 뭐야?'
수사기록을 훑어 내려가면 갈수록 더 재미있는 사실이 드러난다.
'어쭈 생년월일이 똑같네…. 어 본적도 똑같네…. 현주소도…. 아니 나잖아.'
기절초풍하기 직전 안면이 있는 경찰이 들어온다.
"아니 형님. 이거 어떻게 된 거요?"
수사기록을 본 경찰이 화들짝 놀란다.
"그거 어떻게 봤어? 그거 보도하면 안돼."
"보도고 뭐고 왜 용의자가 나냐고?"
경찰은 어이 없다는 표정이다.
"용의자가 강형이라고?…주민등록증 좀 줘봐."
"주민등록증이 어딨어, 잃어버렸지."
"그러면 면허증."
"운전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면허증."
경찰은 난감하다는 듯이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럼 어쩔 수 없군, 손가락 좀 줘봐."
즉석에서 지문을 채취해 용의자의 지문과 대조해본다.
"지문이 같네. 어떻게 된 거야?"
강혁은 사건이 발생한 날 저녁, 회사로 들어오기 직전 1진이 친 삐삐를 받았다. 삐삐를 받고 전화를 하자마자 욕부터 튀어나왔다.
"야, X팔. 너 뭐하는 놈이야?"
"네?"
"뭐하는 놈이냐니까?"
"네…. 수습기잔데요."
"수습이 벼슬하는 놈인 줄 아냐?"
"네?"
"영등포 알아, 몰라?"
"영등포가 어딘데요?"
"야, 너당장 사표써들고 기자실로 와."
영문을 모르고 당한 강혁은 타사 기자에게 물었다.
"영등포가 어디여요?"
"어, 영등포, 영등포 H은행 지점 있잖아. 금고에서 4억3000만원 털렸다고 30분 전에 신고 들어왔는데 몰랐어?"
헐레벌떡 H은행 지점으로 뛰어갔을 때 마침 직원들이 있었다. 강혁은 신분증을 보이면서 금고를 보여달라고 말했다.
"경찰이 내부인, 외부인 모두 출입통제하라고 했는데요."
"출입통제요?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지점장인데요."
"아, 지점장님, 이러지 마시고 금고 한번만 보여 주세요. 지점장님이 금고 안보여 주시면 저 오늘자로 밥줄 떨어져요."
지점방을 어르고 구슬리고 협박까지 해가면서 4중 금고를 탐색했다. 금고를 보여주는 조건은 '절대 보여줬다는 말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는 것.
세번째 문까지는 지점장의 안내를 받았지만 마지막 문을 보는 순간 흥분돼 스스로 문을 열었다. 돈이 털려서 인지 몰라도 금고는 아주 썰렁했다.
"근데 여기 얼마 있어요?"
"말씀드릴 수 없는데요."
"어때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저…, 2억5000만원 있는데요"
지점장은 엉겁결에 금고 안에 있는 돈이 얼마 있는지 말해 버렸다.
설명을 들은 경찰은 허탈해진다. 유일한 증거인 지문이 아무 쓸모없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경찰은 N방송 사회부에 전화를 걸어 강혁이 수습기자라는 것을 확인한다. 지점장에게도 어젯밤 강혁을 안내해 금고를 살폈다는 사실을 전화로 확인한다.
그러나 강혁의 의문은 더욱 커진다. 경찰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뒤 금고조차 확인하지 않은 것이었나? 게다가 마지막으로 금고를 본 유력한 참고인이 나타났는데 실제로 금고에 얼마가 들어있었느냐고 묻지도 않고 보내다니? 수사가 혼선을 거듭하는 것도 알 만했다.
순간 강혁은 아찔해진다. 수사기록이라도 훔쳐보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용의자로 몰려 수사를 받았을 것이다. 기사까지 물 먹은 판에 1진이, 회사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금고털이 용의자에 실직자…. 악몽 같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수사본부를 나오던 강혁은 신음하듯 중얼거린다.
"더러운 놈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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