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켜·며] 기사와 광고사이

기자들의 눈높이가 자꾸 높아져 가는 듯해서 걱정이다. 기자들도 생활인이므로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고 건강을 위해 골프치는 걸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취재와 편집 활동을 하면서 우리 사회의 기득권 층에만 눈을 맞추는 것은 언론인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왜 새삼스럽게 원론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가. 최근 군산 대명동 속칭 ‘쉬파리 골목’에서 일어난 매매춘 여성의 화재 참사에 대한 우리 언론의 무관심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 사고로 20대의 젊은 여성 5명이 불에 타 죽었다.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단순 화재 사고였다. 대부분의 언론은 그걸 작은 기사로 정말 ‘단순하게’ 처리했다. 한 매체만 그 사건에 의혹을 가지고 추적해, 피해자 숙소에 철창이 쳐 있고 출입통로는 이중으로 잠겨 있는 등 업주의 감금에 의한 참사였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다른 언론은 침묵했다. 피해자의 한 맺힌 일기장이 발견됐을 때야 몇 개의 매체에서 상자 기사로 다뤘을 따름이었다.

업주의 금품 갈취, 관계 공무원과의 유착 의혹이 제기되고, 시민단체에서 대책위를 구성하는 동안에도 언론의 냉대는 여전했다. 방송국에선 뒤늦게 취재에 나섰다고 한다. 씨랜드, 인천 호프집 참사 때와 확연히 다른 보도 태도이다. 윤락녀 죽은 걸 다루기엔 우리의 신문과 방송이 너무 고결한 것일까.

그렇다면 큰 일이다. 그늘진 곳, 아픈 곳을 찾아 그곳을 밝게 만들고 낫게 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을 촉구해야 하는 언론 본연의 사명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말한다. 그런 기사거리를 찾아도 편집, 보도국의 간부들이 크게 써주지 않는다고. 그건 사실이다. 우리 언론은 갈수록 재미와 정보 전달에만 치중한다. 무거운 주제는 피하려 한다. 소비자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들 스스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것이 면책 사유가 되는가를. 신문판매와 뉴스시청률 경쟁의 노예로 순치되는 게 옳은지를.

기자들은 일부 매체에 보도된 피해 여성들의 일기장을 다시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날고 싶다. 훨훨 새가 되어 꽉 막힌 곳을 벗어나…” “…정말 아파서 죽겠다…손님을 죽이고 싶도록 싫어도…”

억압생활의 고통이 곳곳에 스며 있다.

반성하자. 살아서는 쇠창살에 갇혀 남성들의 노리개가 되었던 그들의 원혼마저 우리 언론이 업신여겼음을. 제도 언론의 기자들이 ‘마이카 족’이되면서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있다. 차로 갈 수 있는 범위에서만 취재, 보도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과장되긴 했지만, 가슴에 새겨야 할 진실이 담겨 있다.

한 온라인 매체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신속하게 보도하고 속보를 통해 윤락 실태를 심층 분석한 것에 대해서 기성 언론은 뼈아프게 생각해야 한다.
박주선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