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책꽂이에서 '기자협회보' 축쇄본을 꺼내 들었다. 91년 9월부터 95년 6월까지 3년 9개월간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협회보에 첫 발을내 딛던 당시, 기협은 썩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다. 장사가 잘 된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리 저리 꼬이고 일선 제작 현장에서 상처입고 헐벗은 '고독한 기자'들의 해방구 역할을 일정하게 수행했다는 뜻이다.
유력 경쟁지였던 언론노보도 마찬가지였지만 협회보 기자들은 기자 이전에 다층적인 업무를 떠 맡았다. 그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것이 이른바 사교계 적응능력이었다. 화려한 이력과 눈부신 언술을 구사하는 회원님들을 상대로 말벗이 되고, 그들의 뜻을 받들기 위해선 적지 않은 내공이 요구됐다. 지력이 약한 필자는 주연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온 몸으로 때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술이 사람을 먹듯 그러한 분위기에 인이 박히는 것을 실감했다. 때로는 후배라는 그늘에 숨고 아마추어임을 강변하면서 협회보 말석을 지킬수 있었다. 협회보 기자 이력사를 살펴봐도 사교계와 화류계 적응능력, 그리고 한량 같은 여유가 없을 경우 그리 오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이슬처럼 영롱하신' 박인규 국장(현 경향신문 국제부 차장)과 '현실적 원칙주의 노선을 견지한' 백병규 차장(현 말지 편집국장)의 따뜻한 지도아래 '한국야바위(베트남어로 기자를 뜻함)협회'의 중견으로 성장할 무렵, 당대의 협객임을 자부하던 선배들이 하나둘 협회보를 떠났다.
후견인이 절대 부족인 상황에서 헌팅에 나서야 했다. 신인을 발굴, 협회보 지면에 끌어들이고 그들의 언론민주화에 대한 신심을 등에 엎고 마치 밀정이된 기분으로 마지 못해 저격수 노릇을 수행해야 했다. 기자협회보 제작 현장에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들은 안다. 협회보 기사가 얼마나 정밀해야 하는지, 그리고 고난도 기자플레이가 수반돼야 하는지를. 숱하게 깨지면서 '선수'들을 상대하는 노하우를 체득할수 있었다.
지금도 동류의 길을 걷고 있다. 어느새 이 쪽 업계에선 고참이란 소리를 듣는 신세로 변했다. 기본에 충실한 나라가 훌륭한 나라라고 하는데, 이 점에서 기협과 협회보는 기본에 충실한 조직이다. 그 조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넘쳐나지 않는 용기를 배우고, 당당한 겸손을 깨닫는다. 울적할 때, 협회보를 들른다. 프레스센터 13층 기자협회 사무실한귀퉁이 편집국, 그 곳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던 내 잔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자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숱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 묻어 있다. 바라건데 그 따뜻한 휴머니즘이 오랫동안 지속되길 소망한다.
장현철 전 기자협회보 기자 미디어오늘 편집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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