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1000호라는 무게 때문이었을까. ‘나와 기자협회보’라는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사사로운 감상에 잠겼다. 고백하거니와 기자협회는 언론인으로서 나의 길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다.
스물 안팎의 ‘신세대’였음에도 도대체 눈앞이 암담하기만 했던 70년대 후반 대학시절이었다. 명동성당 근처에서 학생운동 선배와 함께 ‘동아투위’ 해직기자를 만났을 때 처음 기자협회라는 조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훗날 한겨레에서 선후배로 만났던 그 분은 그때 내게 언론운동을 들려주면서 기자들의 조직인 기자협회가 현재 전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우여곡절 끝에 몸담게 된 동아일보를 떠날 때도 기자협회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김중배 편집국장이 돌연 경질된 91년 여름이었다. 기자협회를 찾아 ‘숨은 권력과 편집국민주주의’ 제하의 원고(기자협회보 91년 8월 14일자)를 넘겼다. 동아일보 평기자가 동아일보 사주를 내놓고 비판한 글이었다. 당시 기자협회장과 협회보 편집국장은 내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고마운 충고를 해주었다. 그날 원고를 넘기고 곧장 북한산을 오른 기억이 새롭다. 한겨레로 옮긴 뒤 기자협회보에서 편집위원 제의가 왔을 때 내심 반가웠던 까닭도 언론인으로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두 순간에 모두 기자협회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년 정도의 편집위원 시절은 그래서 한결 뜻깊었다. 더구나 기자협회 후배들의 민주언론에 대한 헌신적 열정은 언제나 내게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자협회가 영등포의 허름한 공간에서 편집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밤늦게까지 신문을 만들던 편집국 기자들의 진지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실 나는 제도언론에서 만난 여느 후배들 못지 않게, 기자협회보 기자들의 순수한 눈빛에 늘 감동을 느껴왔다. 때때로 기자협회보에 전화를 걸어 자신을 꼬집는 기사에 대해 무례하게 항의하는 기름진 표정들과는 너무 대조적이지 않은가. 기자협회보에 써왔던 ‘우리의 주장’들을 들춰보면 더욱 부끄러움이 앞선다. 젊은 기자들이 언론개혁의 주체로 일어서야 한다는 ‘외마디’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열매 맺지 못한 것이 현실 아닌가.
인사동에서였던가. 편집위원 자리에서 ‘퇴출’ 당할 무렵 기자협회 후배들과 솔잎주를 마시며 언론노동현장을 지키겠다고 한 약속조차 지키지 못했다. 뒷전에 머물게 된 오늘,데스크에서받아보는 기자협회보는 내겐 추억의 신문이다. 후배들의 기사를 읽으며 가끔씩 눈시울을 적시지만 그 못지 않게 기자협회보는 다시 전의를 샘솟게 하는 투쟁의 신문임을 고백한다면 사족일까.
손석춘 전 기자협회보 편집위원 한겨레 여론매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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