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훼손 판단 언론 본질 고려해야
내용 자체보다 보도 배경 등 과정에 무게 실었으면, 법조집단 잇딴 명예훼손 승소를 보고
이재진 한양대 신방과 교수
지난 12일 서울지법 민사합의 25부는 병역비리와 관련된 군법무관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경향신문이 명예훼손적 기사에 대한 책임으로 군법무관 5명에게 500만 원씩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바로 얼마 전 있었던 대전법조계 비리 보도관련 강제조정 결정과 함께 법조집단의 대 언론 명예훼손 소송은 거의 100% 법조계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판결들은 소송의 승패 이전에 언론을 상대로 제소한 주체가 사법권의 담당자인 검사나 법무관들이며, 이러한 주체들의 ‘특정 다수’가 소송을 제기하였으며, 명예훼손의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의 기준이 명확치 않은 점이 눈길을 끈다.
먼저 국가권력의 담당자인 공직자나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공적 인물이 명예훼손으로 인한 보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국 법의 경우 소위 공인(public persons)의 경우 언론이 문제가 되는 기사의 보도 당시 보도 내용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거나 또는 그 진실여부에 대해 부주의했다는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를 증명하지 않으면 보상을 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한국의 대법원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서 공인이라고 해서 현실적 악의를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판시하여 이러한 원칙을 수용하지 않았다. 다만 면책사유로서 보도의 내용이 진실하며 오로지 공익에 관련된 것일 때 그리고 보도 당시에 그렇게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인정하고 있다.
둘째, 명예훼손 소송의 제기가 가능한 사람은 몇 명 정도인가? 본질적으로 명예훼손법은 개인적인 것이다. 하지만 복수의 집단적 명예훼손(group libel) 소송도 가능하다. 이 경우 문제는 얼마나 많은 다수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 판례들의 경우 대개 15인 이하의 사람들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경우에도 일괄적인 명예훼손(blanket slur)이 인정되나 100인 이상의 경우 보상을 구할 수 없는 경향이 있다. 15인에서 100인의 경우는 사안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한 신문이 시경에 속한 한 경찰의 공무와 관련된 비리를 익명으로 보도하자 명예훼손적 내용에 대해서 21명의 경찰이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소송을 제기한데 대해 연방고등법원은 여기에 일괄적인 명예훼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동시에 재판부는“집단의모든 성원들이 명예훼손 소송을 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에 심대한 위축을 가져 올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국의 경우 아직 ‘특정 다수’의 기준을 제시하는 판례가 눈에 띄지 않는데 단지 특정 지역이나 지방 사람들에 대해서 명예훼손적 보도를 하는 경우 해당 지역 사람들이 모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힌 바가 있다.
셋째, 명예훼손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공인과 관련된 미국의 판결을 살펴보면 내용 자체의 오류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그 내용적 오류가 발생하게 된 언론사의 배경이나 구체적 행위를 통하여 명예훼손의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이러한 점을 참작하고 있다. 그래서 보도를 위하여 충분한 조사과정을 거쳤는지를 따져 명예훼손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법무관 관련 판결을 보면 오류에 대한 배경이나 행위를 묻기보다는 확실치 않은 내용을 단정적으로 보도했는가 또는 어느 정도의 의문 제기에 그쳤는가를 가지고 명예훼손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내용의 명예훼손 여부를 언론사가 보도에 있어서의 악의적 요소가 얼마나 내포되었는가를 가지고 판단한 듯한 느낌이다.
결론적으로 미국과는 다른 한국의 사회적 상황이 법적으로 판단되는 과정에서 언론자유의 중요성과 개인적 명예권의 중요성을 비교형량하는 경우 좀 더 유연한 사고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언론이 어떠한 악의적 의도나 잘못된 행위를 통하여 명예훼손적 기사를 쓰게 되었는가를 살펴볼 여유가 필요하다. 한국 법원도 이러한 악의적 요소를 고려하고 있으나 언론의 본질이 국가권력 감시 및 비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하며, 따라서 명예훼손적 오류를 너무 보도 내용 자체에 국한하여 판단하려는 경향은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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